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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세젤이맘 Sep 25. 2021

그래도 추석은 옳았다




"아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든다.. 추석 이런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 오후, 오랜만에 긴 고향방문을 위해 오후 반차를 내고 퇴근한 나를 맞이한 남편의 말이었다. 전날 밤 야간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한 남편은 예약된 병원 진료와 가스레인지 후드 AS 기사 방문으로 잠을 거의 못 잔 상태였다. 야간근무를 하고 나면 적어도 3~4시간은 자야 활동이 가능한테 하필 그날 병원 예약이 있었던 걸 깜빡했고, 약 30번 전화 시도로 AS가 접수된 후드 시공업체 기사가 일방적으로 약속시간을 잡고 방문하기로 돼있어서 어쩔 수 없이 퇴근한 남편이 기사를 맞이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한 채 긴 귀향길에 나서야 하는 남편은 그날따라 맘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추석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남편의 반응이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명절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고 고향에 가는 대신 해외여행을 가거나 개인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나조차도 결혼식, 돌잔치, 명절 행사 등 이런 겉치레 행사들이 코로나 기회로 확 줄었으면 좋겠다며 배운 척, 뭘 좀 아는 척 얘기하지 않았던가.


결혼식을 준비하며 안 써도 되는 돈들이 아까웠고, 혼수, 예물 등 으레 남들 한다는 것들을 준비하며 양가 신경전이 오가는 것이 불편했으며, 누군지도 가물가물한 사람의 자녀 결혼식 알림 문자를 받고 맘에도 없는 경조사 비용이 품앗이처럼 오가는 형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특히 한국의 명절은 여자들에게만 주방 노동이 집중되는 불공정한 대표적인 행사로 인식되면서 바뀌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 높이곤 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코로나로 두 번의 설 명절과 한 번의 추석절을 고향방문 없이 지내고 보니 부모님의 온기가 느껴지는 편안하고 낡은 시골집이 그리웠다. 더구나 친정은 익산, 시댁은 정읍, 같은 전북권으로 약 1시간 거리라 움직이기가 편했다. 얼마 만에 방문하는 고향인가.






친정아빠는 8남매 중 7번째였다. 6명의 고모들과 큰아버지 한분, 귀한 아들이 둘 밖에 없는 이씨 집안에 우리 엄마는 작은 며느리였지만 큰아버지가 결혼을 늦게 한 탓에 10년 이상 혼자서 이 집안의 명절과 제사를 모두 소화해 냈다. 명절이 되면 고모들과 고모부, 사촌언니 오빠들까지도 넓지 않은 우리 집으로 다 모였다. 안방에는 남자 어른들이, 작은방은 고모들이 차지했다. 주방은 각종 음식과 재료들이 씽끄대부터 바닥까지 늘어져 있어 온 집안에 발 디딜 틈 없어 발꿈치를 들고 다녀야 했다.


'하하 호호' 호탕한 유머까지 겸비한 풍채 좋은 고모들은 서로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있기도, 앉아있기도 하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시종일관 박장대소였고, 남자 어른들은 정치 얘기를 하거나 고스톱을 치셨다.


아빠는 식구들이 그렇게 모이는 날, 가장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혼자서 그 많은 가족들의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면서 몸살을 앓으셨지만 그래도 내심 좋아하셨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힘들어도 아빠가 저리 좋아하니 엄마도 좋다고 하셨다. 어릴 적부터 봐왔던 북적북적한 명절 풍경이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점차 사라졌지만 그날의 추억은 많이 정겹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그래서일까. 관습, 형식과 허례허식을 없애야 한다고는 했지만, 친적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쉼과 웃음 그리고 가족을 공유하는 명절은 싫지 않았고, 살짝 설레기까지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을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출근을 하고 만만치 않은 세상을 견뎌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조금 힘들어도 기꺼이 감내할만한 즐거운 수고 같았다.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를 절실히 느끼게 되는 그런 시간 중 하나였다.


어머니들이 해주시는 집밥과 북적대는 사람들, 송편, 전, 갈비, 잡채 등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음식들은 꼭 잔칫날 같았고 어린아이처럼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아이들 장난감, 과자 부스러기로 온 집안은 난장판이 되지만 그 속에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고, 주방에서는 하루 종일 맛있는 기름 냄새가 나는 그 어수선함이 참 정겹고 좋았다.






8살 큰 애는 시골집에 방문할 때마다 도시와는 다른 이색적인 풍경에 질문을 쏟아낸다.


'엄마 여기는 왜 집이 다 오래됐어?'

'엄마 여기는 왜 이렇게 논이 많아?'

'엄마 정읍은 왜 여기저기 깻잎이 붙어있어?'


정읍은 내장산 단풍이 유명해 건물이나 이정표에 단풍나무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큰애 눈에는 그게 깻잎으로 보였나 보다.


익산 친정집은 바로 옆에 석재 농공단지가 있고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돼지농장을 운영하는 앞집은 명절때만 되면 하루종일 돼지가 꽥꽥 울어대고, 돼지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얼마 전 이사를 가 조용해졌다. 앞마당에는 큼지막한 감나무가 있어 이맘때쯤이면 감이 탱그럽게 매달려 있다. 뒷마당에는 친정엄마가 소일거리로 배추, 고추, 무 등 작물을 재배하는 작은 밭이 있고 그 옆에 위치한 뒷집에 똥개 흰둥이와 고양이가 있다. 아이들의 최고 재미는 당연히 개와 고양이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개와 고양이를 집 밖에만 나가면 볼 수 있으니 4살짜리 둘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뒷집으로 가 개와 이야기를 나눈다.


뒷집으로 가는 길에는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 길바닥에 응아를 크게 싸 둬 아이들에게 똥을 밟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당부해야만 했다. 세상에, 사람이 다니는 길에 똥이 있다니. 똥냄새는 시골냄새와 섞여 보지만 않으면 똥이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했다. 그리고 그걸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때가 되면 범인의 주인이 알아서 치울 터였다.


'너는 엄마가 어디 있니?'

'일로와 봐~ 나 안 무서워~'

'엄마! 쟤는 내가 무서운가 봐 왜 나한테 안 오지?'


흰둥이 똥개는 목줄에 묶인 채로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매우 제한적인데 그 조차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가깝게 보고 싶은 둘째의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몇 번을 불러도 반응도 없다. 그래도 둘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흰둥이를 찾는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 돌아보니 엄마의 작은 밭 옆에 있는 뒷집 앞마당에서 큰 솥단지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돌무더기를 쌓아 공간을 만들고 숯과 나무장작을 넣어 불을 지핀 후 그 위에 솥단지가 얹혀 있다. 타는 냄새가 옷에 밸 것 같았다. 뒷집 아주머니와 그 아들은 한 손씩 힘을 모아 주걱을 맞잡고 솥단지 안을 휘젓고 있었다.





친정집 앞마당에는 연휴 내 아이들과 내 빨래가 건조대에 널려 있었다. 이번 추석은 유난히도 날이 좋았는데 초가을 햇볕은 여름의 강렬함이 남아서일까, 아침나절에 널어두면 점심 전에 걷을 수가 있었다. 아무리 성능 좋은 건조기도 이 바짝 마름을 따라가지 못할 터였다. 빨래를 걷고 햇빛에 실오라기 하나까지 물기를 빼앗긴 옷더미에 얼굴을 파묻으면, 섬유유연제에 햇빛 냄새까지 섞인 고슬 거리고 따뜻한 자연살균 향이 올라온다.


메뚜기, 쥐며느리, 나비, 벌, 파리, 개미, 나방, 모기...

시골에서는 아주 흔한 곤충들을 보고 아이들은 신기해 죽는다. 파리만 봐도 발을 구르며 잡으러 다니고 나비가 나오면 사진을 찍으라고 난리다.



'할머니! 우리 송편 만들면 안 돼요!!?'


친정엄마는 다른 음식들은 풍성하게 준비를 해놨지만 송편만큼은 조금 사 먹고 말자고 준비를 하지 않으셨었다. 쌀이랑 쑥을 갈고 반죽을 만들고 송편 소를 만들고, 송편은 라면 끓이듯 뚝딱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료가 없으니 나중에 하자고 큰애를 설득하자 친정엄마는 어느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송편 반죽을 누가 주기로 했으니 저녁에 준비해 만들자고 했다.


이런 풍경은 익숙하다. 친정엄마는 마을 이웃집에 다녀오기만 하면 반찬을 한 가지씩 들고 오셨다. 급하게 밥이 떨어지거나 요리의 재료가 떨어져도 앞집에, 옆집에 건넛집에 전화해 밥 한 공기를 얻어 오신다. 어느 집 딸이 왔다고 하면 그 집 딸이 좋아하는 고구 맛 순 김치를 담그라며 새벽녘에 밭에서 방금 딴 고무 맛 순 줄기를 한 움큼 현관문 앞에 두고 가신다.


오후에는 샤인 머스캣 농사로 대박이 났다는 권사님 댁에서 샤인 머스캣 한 박스가 도착하고, 이 지역에서 제일 큰 양계장을 운영하는 집에서는 초란과 쌍란을 시중에 반값도 안 되는 가격으로 동네 이웃들에게 판매를 한다. 호박 하나, 오이 두 개, 상추 한 움큼.. 비록 얼마 되지 않은 가격의 야채들도 정을 한가득 담은 채 이 집 저 집을 왔다 갔다 한다.






깨를 볶아 갈고 설탕을 섞어서 송편소를 만들었다. 반죽은 얻어 왔으니 누가 누가 예쁘게 만드나, 아이들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송편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둘째가 소 그릇을 뒤엎어도 떡고물이 덕지덕지 묻은 손이 얼굴을 더럽혀도 오늘만큼은 더 관대한 엄마가 된다. 저 작은 손으로 반죽을 주물럭거리며 연신 재밌어하는 아이들을 보니 명절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추석은 뭐니 뭐니 해도 송편을 만들어야 제맛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힘들까 봐 모든 음식을 명절 전에 다 준비를 해놓으신다. 5남매를 키우시고 며느리 둘을 얻으셨건만 며느리 둘까지 자식 일곱을 키우는 것처럼 대해주신다. 시어머니계의 최수종?이라고 하면 적절한 비유가 될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제일 자상한 시어머니를 둔 덕에 작은 며느리는 이번 명절도 시댁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연휴 중간 출근을 해야 하는 남편은 친정에서 동탄으로 올라가버려 아이들과 며느리뿐이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시댁으로 향했다. 이런 나를 친구들은 남편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래도 시댁은 시댁이지 않냐고, 남편조차도 자기 근무 끝나고 오는 날 같이 가자고 했지만, 에잇~ 불량 며느리는 그냥 시댁이 편하고 좋다. 아이들만 데리고 방문하는 시댁이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역시 시어머니의 밥상은 매번 18첩 반상이다. 아침부터 갈비에 해물탕에 잡채까지 반찬들을 전부 올려놓지 못해 밥은 들고 먹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시어머니는 부족한 음식은 없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바로바로 접시를 채워주신다. 정작 본인은 순식간에 식사를 마치고 빠르게 설거지를 해치우신다.


밥을 거의 먹어가면 과일을 접시에 담아 며느리 옆에 놔주시고 과일을 거의 먹어가면 믹스커피 한잔이 예쁜 잔에 담겨 과일접시 옆에 놓인다. 설거지만이라도 며느리를 시켜달라 애원하지만 '여기서나 편히 쉬어라' 하시면서 엉덩이로 끝까지 며느리를 몰아내신다.




여기서나 편히 쉬어라..





어머니는 며느리와 비슷한 또래의 딸 셋을 키우고 계신 터라 며느리의 일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고 시댁에서만이라도 며느리들이 주방 노동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셨다. 저 몇 마디 되지 않는 짧은 문장에.. 며느리의 고단함을 알아주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진심으로 감사했고 며느리는 감동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고 나니 시어머니는 천변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조형물이 많고 야경이 예쁘다며 산책을 나가자고 하셨다. 아이들은 신이 나 옷을 입기 시작했고 나도 같이 따라나서려는데 며느리는 집에서 쉬라고 하신다. 혼자서 아이들 데리고 친정 갔다 정읍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집에서 쉬고 있으라고....


아 이 또 한 번의 감동의 물결이라니.. 불량 며느리는 이번에도 '네 어머님 감사해요'라고 대답하며 배웅만 하고 만다.


가족들 중 유일하게 술을 마실 줄 아는 며느리들이 온다고 하면 시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술친구를 반길 준비를 하신다. 마지막 날 이른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자 시아버지는 조용히 밖에 나가시더니 작은며느리가 제일 좋아하는 회와 맥주를 사들고 오신다. 도톰하게 썰린 회는 갓 잡은 싱싱함 그대로 며느리 안성맞춤 안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며 분위기는 무르익는다.


마흔 언저리의 우리는 누군가의 부모이자 누군가의 자식이다. 어느덧 마흔을 넘은 어른이 됐지만 부모님에게는 아직 한없이 걱정되고 손이 가는 불완전한 존재들 아닌가.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어색하고 아이 같을 수가 없다.


남편이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 앞에서 혀가 짧아지는 막내아들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부모는 마흔 넘은 자식도 한순간에 아이로 돌려놓는 그런 존재고, 고향집에는 그런 부모들이 있다.


햇빛, 바람, 공기, 논과 밭, 벌레, 곤충, 송편, 갈비, 전, 홍어무침, 뻥튀기, 빛바랜 벽지, 찢어진 벽지 사이로 보이는 갈라진 콘크리트 벽,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액자들... 시골스러움이 묻어나는 이것들이 참 좋다. 같은 하늘 아래지만 그곳에서의 햇빛과 바람은 다르다. 공기도 다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몸에 잔뜩 힘을 줄 필요도 없다. 열심히 달릴 필요도 없다. 언제까지나 내편일 것 만 같은 부모님들이 있는 그곳에서, 잠깐의 쉼과 여유, 기댐, 늘어짐, 배 터짐을 누릴 수 있는 추석은 이번에도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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