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수원 나혜석 거리는 전날 내린 눈이 다 녹지 않아 사람들은 몸을 웅크린 채 총총걸음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12월 주말 저녁 레스토랑은 빈자리가 거의 없었고 10분쯤 먼저 도착한 나는 홀 중앙에 예약된 2인석 자리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 아마 너랑 동갑이거나 한 두 살 정도 어릴 거야, 애 착하고 성실하고 키도 커. 우리 제대에서 괜찮은 애 중 하나니까 잘 만나봐"
경찰관 기동대에서 근무 중이던 선배는 소속 직원 중 나름 엄선해서 자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연하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어린 남자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33살인 내 나이를 생각하면 이제 한 두 살 정도는 어쩔 수 없겠구나, 괜찮은 남자들은 벌써 자기 짝을 찾아 이미 결혼까지 다 해버린 현실, 나도 괜찮은 사람을 만나려면 이제 한 두 살 정도는,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다 싶은 마음이었다.
"딸랑-라-랑"
출입문이 열렸다. 1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큰 키, 갸름하고 하얀 얼굴, 검은색 안경, 베이지색 코트에 아이보리 폴라티, 면바지, 소개팅남의 정석 같은 단정하고 깔끔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오홋! 실물이 더 잘생겼네?!!'
직원용 내부 포털에서 봤던 증명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괜찮았다.
' 헉, 근데...... 너무 어려 보이는데? 저 얼굴은 누가 봐도 20대 같은데... 한두 살 어린 게 아닌 것 같은데.... '
선배는 분명 동갑이거나 한 두 살 어릴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사람도 30대여야 하는데 저 뽀송뽀송한 피부와 생기 넘치는 건장한 체격, 세월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 풋풋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30대 같지가 않았다. 불안한데..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필요한 말만 적당히 하는 스타일, 나서거나 아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몸에 배어 있었다.
'좀 괜찮아 보이는데.. 근데 아무리 봐도 20대인데...'
가족관계, 경찰 입직 시기 등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그 사람의 나이를 짐작해봤다.
얘기가 오갈수록 불안감은 거의 현실임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저 근데.. 나이가 정확히 어떻게 되시나요?"
용기를 내서 먼저 확인사살에 들어갔다.
" 네 저는 84년생입니다. "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헉, 그럼 29살.. 4살이나 어리다니.. 아... 어떡하지?
경찰관 기동대에서 근무 중이던 그는 이제 막 입직 3년 차의 순경, 선배는 그보다 한참 윗 계급인 경감으로 제대장이었다. 내가 소개팅 시켜 달라고 자꾸 조르니 선배는 나이도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서둘러 자리를 마련한 것이고, 계급사회인 경찰 조직에서 제대장이 나가라고 하니 이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너무 미안했다. 이런 게 바로 계급사회 갑질 아닌가?
" 00 씨 나이는 어떻게 되시나요? 저도 정확하게는 듣지 못하고 나왔습니다. "
아..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삼키기를 몇 번, 자꾸 말을 돌렸다.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궁금하지 않은 근황을 묻고.. 내 신경은 온통 '4살과 갑질'에 집중돼 있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세젤이 맘) "저는 80년생이에요. 선배가 제대로 나이를 확인 안 하고 자리를 만든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연하를 만나본 적도 없고 평소 남자 친구로 연하를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더구나 4살이라면 차이도 너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
(소개팅남) "저도 4살 차이까지는 만나본 적이 없고 결혼 상대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저는 나이 차이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리고 00 씨가 80년생 정도겠구나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나이만 확인하고, 예상치 못한 4살 차이는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남긴 채 헤어졌다.
(세젤이 맘) " 아 선배~! 뭐야 진짜~! 나이 확인했어요? 안 했어요? 4살이나 어리잖아요~!! 선배가 나가라니까 억지로 나온 거 아니에요? 진짜 왕 실망이에요!!"
(선배) " 아 그래? 너 82년생 아니냐? 나는 너네 둘 다 81년생에서 83년 그 언저리인 줄 알았다, 아이~ 미안하다야 허허~ 뭐 어때? 나이가 뭐 중요하냐? 그나저나 어땠어? 맘에는 들었고? 맘에 들면 얘기해. 내가 팍팍 밀어줄라니까"
아니, 이 선배가 미쳤나~ 맘에 든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만나게 할 생각인가? 진짜 갑질로 내부고발이라도 당하려고 하는 거야 뭐야~ 사람은 괜찮아 보였다. 나이차만 아니라면 한 두 번은 더 만나보고 싶었지만 언감생심, 그 사람에게 그러면 안됐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선배에게 신신당부했다.
(세젤이 맘) " 선배, 혹시라도 그 사람한테 아무 말도 말아요!! 알았죠? 먼저 연락을 해보라느니, 한번 더 만나보라느니, 그런 소리 절대 하면 안 돼요~!! "
다음 날,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나의 소개팅은 직장동료들과 친구들에게도 꽤 흥미로운 이슈거리기 때문에 너도나도 소개팅 결과를 물어왔다.
" 4살이라고?! 아, 차이가 너무 나네 "
" 야, 4살이면 너무 어리다야, 안 그래도 남자들은 정신연령이 여자보다 어린데 4살 차이면 안 돼~ 됐다, 네가 힘들 거야, 잊어라! "
사람들은 4살 차이면 역시 무리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니 누가 모르나?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4살 차이가 어때서..
그날 '잘 들어갔냐, 오늘 즐거웠다'는 뻔한 카톡만 주고받은 후 그 사람에게 연락도 없었다. 서로 연락하지 않을 거란 사실은 그날 헤어지면서 암묵적으로 짐작했던 사실이었다.
속절없이 시간은 또 흘렀고 그렇게 새해는 또 밝았다.
나는 34살이 되었다.
2013년. 1월 1일.
전날 수원에 놀러 온 엄마를 배웅하기 위해 고속버스 출발시간을 기다리며 고속터미널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카톡 왔어~'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핸드폰 액정 밖으로 카톡의 첫 줄 메시지가 보였다.
' 잘 지내고 계시나요? '
그 소개팅 남이었다. 뭐지? 앞으로 같은 조직 내에서 생활하다 보면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이것도 인연이니 새해 인사하려나 본데? 에이~ 안 그래도 되는데.. 싶었고 의례 형식적으로 카톡을 주고받았다.
3번째쯤 주고받았을까?
그가 보낸 3번째 메시지에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나대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온몸이 찌 릿지릿 하면서 자꾸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새해가 돼서 저도 30대가 되었습니다. 같은 30대인데 나이 생각하지 말고 한번 더 만나보고 싶습니다'
겨울은 온 세상을 꽁꽁 얼려버리는 야속한 계절이기도 하지만 하얀 눈을 뿌려 세상을 신비롭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12월만 되면 등장하는 빨간색 장갑과 캐럴은 사람 마음을 괜히 동동 띄워놓는다. 빨강과 하얀 눈 속에서 혹시 내가 특별한 이벤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 있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겨울은 그런 계절이 아니던가?
옆구리 시리게 나이만 먹어갈 뻔했던 그 해, 당당히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그와 내가 주인공인 가슴 설레는 로맨스가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 우리는 그렇게 시작했고 그와 나의 로맨스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에필로그>
2012년 12월, 그와 소개팅을 한 다음 날, 양쪽 나이도 제대로 확인을 안 한 채 주선한 선배 탓에 소개팅남이 4살이나 어린 연하라는 사실에 무척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생각보다 괜찮았던 상대에 대한 설렘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카톡질을 하던 중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 딸~ 어제 엄마가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꿈이 너무 좋은 것 같아서
세젤이 맘 : 응? 무슨 꿈인데?
엄마 : 네가 집에 왔는데 귀걸이를 한쪽만 하고 왔더라고, 그러더니 어디서 구했는지 한쪽 귀걸이를 마저 하더라고, 좋은 꿈같은데 혹시 좋은 소식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