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다음이 있으니까요 -<여행의 이유>, 김영하

by 내일도무사히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첫사랑, 첫경험, 첫 키스... 또 뭐가 있을까요. ‘첫-’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말은 대개 그런 듯합니다. 얼마간 기대하고 설레어하다 조금 실망하기도 하고 짐작과는 다른 뭔가에 놀라고 두근거리면서 그게 이내 추억이 되고. 여행은 이런 ‘첫 번째 무언가’와 닮았습니다.


누군가에 의하면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입니다. 하지만 일상이 없는 여행이라 해서 매시 매초가 반전과 돌발의 연속이라면 그 또한 견디기 힘들 겁니다. 적당한 만큼의 ‘非일상’인 여행. 우리는 왜 그토록 안온한 일상을 벗어나 미지의 여행을 떠나려 애쓸까요. 이번 여행과 다음 여행 사이의 일상, 개인 차는 있으나 대략 6개월을 버텨가는 게 정녕 우리의 삶일까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작가 김영하. 자신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이 글쓰기와 여행이기에, 그래서 나의 정체성은 ‘작가’ 그리고 ‘여행자’라고 설명하는 김 작가가 위에서 언급한 ‘누군가’입니다. 오늘 일독을 권하는 책은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입니다.


*반복되는 패턴, 반복하는 여행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2)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4) 그러나 곧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소설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써왔을까? 소설 쓰기 역시 그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기자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1) 낯선 분야를 담당하게 된다. 두렵다. 2) 어찌어찌 받아들여진다. 3) 그럭저럭 취재하고 기사도 쓴다. 다행이다. 4) 그러나 익숙해지면 곧 다른 어딘가로 담당이 바뀐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저런 패턴은 꽤 익숙하지 않나요.


<여행의 이유>에는 여행에 관한 산문 9편이 실려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여행에서 우러난 다양한 에피소드와 여러 문헌들을 통해 ‘여행의 이유’를 탐구해 갑니다.


첫 번째 글 ‘추방과 멀미’에서는 십수 년 전 중국에서 추방당하는 김영하 작가가 등장합니다. 소설 집필을 위해 중국에 한 달 체류하겠다며 집까지 구해놨는데 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던 겁니다. 무슨 사연이었을까요. 작가는 하릴없이 한국의 집에 돌아와서는 중국에 머무는 대신 한 달간 ‘내 방 여행’을 떠나고, 후에 <빛의 제국>이라고 이름 붙인 소설을 거의 마무리합니다. 어차피 귀국할 것이었으니 순서만 바뀐 것이라고 정신승리하는 대목에서 저는 실소를 터뜨렸습니다.(추방당한 이유가, 비자 발급을 받지 않아서였으니까요.)


그럼 멀미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작가의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던 대학시절 중국 여행으로 슬쩍 넘어가 ‘키미테’를 붙였던 에피소드를 전개하다 학생운동 경험과 현실 사회주의 사이의 간극에 대해 멀미를 느꼈다고 풀어갑니다. 이런 것들도 ‘여행’이었습니다.


*‘삼십육계 주위상’=여행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 이런저런 서른다섯 개 계책을 썼는데도 소용없다면? 달아나야 합니다. 인생이 때때로 그렇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시포스의 형벌과 흡사합니다. 힘들게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도 바위는 곧 굴러 내리고 시시포스는 다시 처음부터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매일 해치우는데도 설거지 감은 쌓이고 일주일만 닦지 않아도 가구 위엔 먼지가 뽀얗습니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한 법’, 그게 여행이고 여행을 떠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생은 여행... 먼저 도착한 이들의 환대는 필수


특히 와 닿았던 글은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이었습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에 도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여행은 먼저 도착한 이들의 어마어마한 환대에 의해서만 겨우 시작될 수 있다.”


그간 여행에서 경험한 타인의 환대를 생각했습니다. 적잖은 돈을 지불했기에 저에게 돌아온 미소와 서비스만이 아니라, 계산 없는 환대와 친절들. 수년 전 이국땅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카드가 작동하지 않아 쩔쩔매던 저 대신 통행료를 내준 이름 모를 벽안의 청년이라든가, 제가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휴대전화를 찾아주기 위해 제가 구경 마치고 나올 때까지 10분 넘게 기다려준 또 다른 여행자라든가. 인생에서 경험한 타인의 환대에 대해서도 생각이 뻗어갔습니다. 인생 자체가 기나긴 여행이기도 하고 지구별에 잠시 들른 여행자인 저를 먼저 온 이들이 호의를 보여주고 따뜻하게 맞아주기에 제 삶이 이럭저럭 꾸려지고 있다는 그런 생각.


여행의 이유는 결국은 삶의 이유와 비슷한 걸까요. 이 글을 쓰는 지금, 가장 최근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여행을 가기까지 최소 수개월은 지나야 할 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쨌거나 다음 여행을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로

김영하 작가는 중국에서 추방된 뒤에 본의 아니게 ‘내 방 여행’을 해야 했으나 여기 2백여 년 전 이미 자기만의 집 안 여행을 하고는 그 기록을 책으로 내 베스트셀러로 만든 이가 있습니다. 진정한 여행은 익숙한 것을 새롭고 낯설게 ‘발견’하는 것이라는 통찰, 금지된 결투를 벌였다가 40일간 집에 갇혀 있었더니 이런 책이 나오게 됐다는 사연, 형에게 읽어보라고 보냈더니 출간해 버렸다는 뒷얘기 또한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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