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류노스케 <세계의 말들>
"계기가 있다면 어떤 외국어든 가리지 않고 배워 보고 싶다. 물론 속속들이 파고들기는 어렵고 문자와 발음 만으로도 꽤 고전할 것이다. 그래도 한글을 하나하나 쓰면서 외우는 작업은 정말 재미있고, 그것은 아랍문자든 태국 문자든 다르지 않다. 세계의 말들 한국어판 표지에 적힌 내 이름의 한글 표기를 아는 것만으로도 세미나의 학생들은 마음이 뿌듯할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하늘에까지 다다르는 걸 목표로 인간들이 끝도 없이 탑을 쌓아가자 여기에 분노한 신이 그 사람들이 쓰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하여 의사소통이 되지 않게 하여 탑을 쌓는 게 무산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을 빗대는 상징이기도 하고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있을까 하는 데 대한 성경적 답변이기도 하겠죠.
80억 명에 이른다는 세계 사람들, 이들이 사용하는 말은 몇 개나 될까요. 5천여 개에 이른다는 설명도 있는데 정확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어에서도 제주나 부산, 광주 방언을 다르게 구분할 수 있을까, 북한어는 어떻게 분류하나 싶은데 그렇게 분화하면 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자신의 모국어 말고 하나나 둘 정도 말을 유창하게 하는 이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죠, 여기에 한두 개씩을 더하면 언어의 천재 소리 듣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여기 전 세계 100개 언어에 대한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언어학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100개나 되는 말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기에, 도대체 그런 게 가능은 한 건지 언어의 초천재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깁니다. 100가지 외국어로 수다를 떠는 책, 구로다 류노스케의 <세계의 말들>입니다.
책 목차를 보면 정말로 100개의 언어를 다룹니다. 1번 광둥어로 시작해 100번 힌디어로 끝납니다. 한국어판이라 가나다순으로 정렬한 듯한데 2번은 그리스어로 가고, 다음은 네덜란드어, 네팔어, 노르웨이어, 대만어, 덴마크어, 독일어 이런 순이에요. 여기까지야 그럭저럭 들어본 것 같은데 이어서 디베히어, 라오어, 레토로망스어, 랑갈라어, 바시키르어, 베르베르어, 사미어 이렇게 넘어가면 약간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작가의 말처럼 100가지 외국어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다를 떠는 책이니까요, 가볍게 훌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러시아어로 말을 건다. "아저씨, 이 김치 한 봉지에 얼마예요?" 그러자 그쪽에서 휙 일본어로 바꾼다. "어라, 일본인입니까? 신기하네요." 나도 일본어로 말한다. "음, 아저씨, 김치는 얼마예요?" "아, 그냥 가져가세요." "그럴 수는 없죠. 얼마예요?" "그렇습니까, 그럼 2엔 80센만 주세요." 순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차분히 생각하고 다시 러시아어로 묻는다. "그러니까 2루블 80코페이카라는 말씀이죠?
-<일본어>에서
언젠가 아내와 함께 서울에 갔다. 대형 서점에서 아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아내는 한국어를 못한다.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마땅했다. 나는 점원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화장시루 오디예요?" 화장실 물어보기는 회화집의 기본 메뉴다. 점원이 장소를 가리켰으니 틀림없다. 감사를 표하고 방향을 확인하고 아내를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가 보니... 남자 화장실이었다.
-<한국어>에서
지난밤 함께 마신 친구들이 싱글벙글하면서 말했다. "구로다, 너 말이야, 취하니까 러시아어밖에 할 줄 모르더라!" 그 말에 놀랐다. 물론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더 물어보니 일본인 지도원한테까지 러시아어로 말을 거는 지경이었고, 마찬가지로 술에 취한 사샤가 통역을 했다는 것이다. 필름이 끊겨도 할 수 있는 외국어는 내 평생 러시아어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살짝 지끈거리는 느낌이 남은 머리를 감싸 쥐면서 나는 이상한 성취감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이내 불안해져서 물었다. "격변화랑 동사 변화는 잘 맞았어?"
-<러시아어>에서
이튿날 시내로 나가려는데 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몇 시에 돌아오나요?" 현관 열쇠가 공통이라 할머니도 문단속이 걱정됐을 거다. 나도 딱히 늦게 돌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왠지 반사적으로 '페트'pet라고 대답해 버렸다. '페트'는 숫자 5로, 즉 다섯 시에 온다는 말이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그보다 큰 숫자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기분 좋게 나를 배웅했다.
-<세르비아어>에서
한때 외국에 가면 그 나라 서점에 들러 읽지는 못하더라도 그 나라 말로 된 책을 사 오곤 했습니다. 일종의 허영심이었는데 그렇게 그리스어판 <그리스인 조르바>, 이탈리아어판 <장미의 이름> 등을 구입해 가져왔죠. 100가지 외국어 중에 몇 가지는 작가조차 아예, 여전히 읽을 수도 없는데 그 모양이 예뻐서 구입했다거나 그림이라도 보려고 샀다는 걸 보면서 아 나 말고도 이런 분들이 있구나 싶어서 반가웠습니다. 가끔은 한국어도 자신 없을 때가 있고 처음 배운 이래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영어를 하노라면 아직도 울렁거리는데, 하물며 다른 말은... 하면서 팍팍하게 지내온 게 아쉽다는 생각이, 1번부터 읽어나가면서 몇 번이고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이 텔루구어 그림책을 구입했던 대학 시절에 이 책을 가끔 꺼내서 '읽었다'. 그 독특한 글씨를 열심히 살펴보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시 같은 느낌이었는데 같은 모양의 글씨가 행말에 나열되어 있어 분명 운을 맞춘 것이리라 상상하며 즐겼다. 읽을 수 없는 글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텔루구어>에서
*유유출판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