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혹 넘치는 '기사단장 죽이기'

by 내일도무사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를 다 읽었다. '현현하는 이데아', '전이하는 메타포'라 이름 붙인 1권과 2권으로 된 매끈한 양장본이다. 책 내용을 언급하는 것도 스포일러라 할 수 있을 테니, 이후로는 스포일러 가득이다. (일전에 출간 100년이 지난 소설 내용을 약간 자세히 적었다고 하여 '스포일러'라는 비판을 받은 적 있다. 대단한 비판자였다. 그 비판자가 그 뒤로도 그 책을 읽지 않았을 거란 데 100원 건다. )


'기사단장 죽이기'는 잘 읽힌다. 번역문이긴 하나, 20대 시절부터 읽어온 여러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 덕분인지 여러 모로 익숙한 문체다. 단일 작가의 책을 10권 이상 읽는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 텐데 내가 읽은 하루키 책을 꼽아보면 십수 권에 이른다. 술술 읽힌다. 하루키에 대한 (나의, 혹은 여럿들의) 선호는, 읽기에 익숙하고 편안해서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자극적이다. 아니,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제목부터, '기사'라는 말부터 고풍스러운데 '기사단장'에 '죽이기'란다. 이 제목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드디어 하루키 월드가 중세로까지 뻗어나가나, 혹은 판타지? '왕좌의 게임' 팬인 것일까. 드디어 하루키 소설에도 암살 혹은 결투 장면이라도 나오나? 거기에 생뚱맞게 '이데아'와 '메타포'가 '현현'하고 '전이'한단다. 오 이건 도대체 뭐지?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림을 가리킨다는 건 곧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호기심은 죽지 않는다. 저 그림에 숨은 비밀은 뭘까? 새벽마다 울리는 방울소리란? 저 구덩이는 '태엽 감는 새'의 우물과 비슷한 걸까? 멘시키는 도대체 정체가 뭘까? 소녀는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소녀의 아버지와 소녀 실종과의 관계는? 주인공(혹은 하루키)이 가슴에 계속 집착하는 이유는?;;;


'기사단장 죽이기'은 하루키스럽다. 주인공인 '나'는 결혼 6년 만에 아내로부터 돌연 결별 통보를 받는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넋이 나간 '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가 유명 화가의 아들인 친구의 도움으로 그 화가가 살던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파스타 등을 해 먹는 과정이나 음악을 골라 듣는 데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그 흔한 휴대전화나 스마트폰도 갖고 있지 않다. (그림 대신 소설을 쓰고 달리기하면서 고양이를 키우면 하루키...외모도?) 그리 들이대는 스타일도 아닌 듯한 주인공에게 짧은 기간 두 명의 여자 친구(혹은 섹스파트너)가 순차적으로 생겼다 사라진다. 영적 존재라고 할지, 이데아의 현현이라고 하는 뭔가가 나타나지만 주인공은 썩 놀라지도 않고 받아들인다. 언젠가 전에 읽은 하루키 소설에서 본 듯한 그런 게 계속 변주한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일본 과거사를 언급한다.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대학살을 했다는 내용이 잠시, 정말 잠시 나온다. 일본 우익들이 이를 놓고 하루키를 맹비난했다는 식의 기사를 살짝 읽은 기억이 나 유심히 봤는데 정말 짧다.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난징 대학살 언급이 그렇게 화제가 된 이유는, 첫째 하루키라서. 둘째 하루키니까.


1권을 다 읽고 2권도 3분의 2 정도 남았을 무렵에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거야? 하지만 하루키 스타일상, 잔여 분량에서 스펙터클한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업계 용어로 '떡밥'만 잔뜩 던져놓고 회수는 제대로 안된 채, 지리멸렬! 소설은 끝났다. 이데아가 현현했고 메타포도 전이했으나 뭔 소린지 모르겠다. 무슨 얘길 하고픈 걸까, 하루키 선생은. 나이 들면서 가슴성애자라도 된 건가 하는 새로운 의혹이 생겼다.(내가 못 알아차린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에 대한 언급이 잦다. 난징 대학살보다 훨씬 많다.)


하루키의 오랜 독자로서 새로운 하루키 소설을 읽는다는 기쁨과 익숙하게 읽히지만 다른 것을 접한다는 즐거움, 물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신작이야" 하고 원래 독자가 아닌 이들에게 권하지는 못하겠다. 나의 베스트 하루키가 여전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게 유감이다.(1985년작, 내가 읽은 건 2000년이지만) 다시 읽으면 바뀔까. 그럴지도 모르니 조금 시간을 두고 재독해야겠다.


*책 두 권이 들어가는 케이스와 부록인 소책자(돈조반니와 소설에 언급되는 짧은 소설 한 편이 실려 있다)를 함께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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