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가 잘 안 썰려서 읽은 책

by 내일도무사히

우연한 계기였다.


여느 시민들과 다른 정보원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니 종종 접하게 되는 책 관련 기사나 서평, 페친 등의 추천 등을 바탕으로 책을 골라 읽는다. 회사 바로 앞에 마침 큰 서점이 하나 있어 점심시간에 짬 내거나 가끔은 식사를 건너뛰고 서점에 가 저런 여러 소스 중에서도 관심 가는 책을 찾아 들춰본다. 이 단계에서 흥미를 끌지 못하면 탈락, 이를 넘어서면 e-book으로 살지 그냥 살지 단계까지 거쳐 그 책을 내 손으로 쥐게 된다. 산다고 해서 꼭 다 읽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시사인의 서평 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 권남희 번역가의 믿고 읽는 번역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마무라 도요라는 작가는 잘 모르겠고...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요리와 음식에 대한 책들을 다수 냈다는 게 관심이 갔다. 속표지를 바로 넘기면 "이 책은 지금까지 음식을 만들어 보긴커녕 주방에 선 적조차 없는 사람을 위해 쓴 요리 입문서입니다. 동시에 자기가 먹을 것도 만들 줄 모르고 타인에게 기대어 살던 한심한 존재가 점차 지식과 기술을 익히고 경험을 쌓아서 결국 어엿하게 자립하는 일종의 교양소설이기도 합니다. 완전 초보자에게는 실용서로서 큰 도움이 되고, 요리를 아는 사람에게는 '뭐야, 이런 시시한 걸 쓰고 있어' 하고 타인을 얕잡아 보는 기쁨을 맛보게 하는 재미있는 책!"이라고 소개돼 있다.


직전에 뭘 했냐면 나는 양파와 오이, 고추를 썰었다. 최근 갑자기 요리에 맛 들인 아내가 굴라쉬 라고 하는 스튜와 참나물 바지락 파스타, 골뱅이 무침을 곁들인 메밀면 등을 선보였는데 그중에서 골뱅이 무침에 들어가는 오이와 양파 등의 식재료 밑준비를 맡았던 것이다. 집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주로 사 와서 먹는 일이 잦다 보니 이렇게 해 먹는 건 드문데, 설거지와 뒷정리를 맡고는 있으나 준비하는 동안의 역할이 애매하여 개입하다 보니 썰기를 맡은 것이다.


먹방 내지는 요리 프로그램을 가끔 보는지라 채썰기 정도는 척척 해낼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손 다치는 것도 겁이 났고 잘 쓰지 않던 식칼은 매끄럽지 않고 무딘 듯했으며 기껏 썰어놓고도 모양이 나지 않았다. "그건 쉬운 줄 알았냐"는 잘난 척 50%에 핀잔 20%, 농담 30% 배합의 한 마디를 듣고 나니 느껴지는 바가 있었는데 그러다 저 책을 접한 것이다.


저자가 45년생이다 보니 대단히 예스런 말투와 규정과 전략을 제시한다. "남자는 주방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라는 2018년 기준으로 보면 어디 조선 생활사에나 나올 법한 명제를 내세우는 것도 그렇고.(물론 저자는 그런 명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나) "요리는 생존 기술, 남자가 자립하려면 요리가 필요"라는 것도 그 세대에 할 만한 말이지만 내게는 와 닿지 않는 얘기. 하지만 일종의 '냉장고 파먹기'에서 가르쳐주는 소소한 재료를 이용한 요리 기법은 꽤 쓸만해 뵈고 생활에 도움이 될 법한 정보도 여기저기 배치돼 있다. 상비해야 할 기본 식재료 베스트 10..이라든가.


일단 양파라도 썰어보던 내게 정작 필요한 정보는 유튜브에서 찾아야 했으나 조만간 다시 들춰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차려주는 밥에 익숙해져 있다가 스스로 차려야 할 상황을 맞이한, 은퇴한 중년 남성이라든가..에게 좀 더 적합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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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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