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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장구 Aug 23. 2024

사랑과 배신의 등가교환

앙장구의 도덕경제학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사랑과 배신은 사람관계에서 일상이다. 그런데, 과연 사랑은 좋고 배신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드라이하게 논리적으로 짚어보자.

사랑을 받으면 나는 따뜻하고 고맙다, 보답해야만 한다. 미움을 표현하거나 배신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강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자유를 준다.

"사랑"은 고맙다.그러나, 그것은 부채이다. 사람은 빚지고 살면 안된다. 갚아야 한다. 그러나, 누가 나를 배신했다. 아프다. 그러나. 잠시 심호흡을 하고 돌아보라 그것은 부채의 경감이다. 나는 (선의로-민법) 부채감을 느꼈던 것이지만 그 부채가 경감된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깨어난다. 자유로워진다. 보복할 필요까지는 없다.(어리석게!) 그냥 손을 놓으면 된다. 당장 손을 놓지 않아도 된다. 나는 까방권을 얻은 것이다. "나를 버린 자여 참으로 고맙구나"

전제가 당연히 있다. 독립적이고 책임감있는 영혼이다. 행위능력을 갖춘  펑등한 성인들 사이에는 사랑과 배신의 사건도 거래에 관한 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대체로 사랑과 배신은 장기적인 관계에서 발생하므로 일종의 반복게임을 톰하여 공평하게 정산되기 마련이다.

일단 가까이 배우자와 장성한 자식은 나와 거래관계에 있다. 퍼스트 무버는 분명히 나 자신이다.  나 자신 순수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은 스스로 크게 반성하는 것이 마땅하다.(방식이 직접적인 사과를 포함하는지의 여부는 말하기 어렵다. 나자신에게도 그렇지만 대상에 대하여 일으키는 반응도 정확하게 예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한 타인인 그(그녀)의 몫이다. 그것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든 관여할 권리도, 의무도 방법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평등, 그리고 각자의 자존감, 책임감이다.    

그러나 부모에 대한 관계는 다르다. 그것은 평등한 양자간의 반복게임이 아니다. 일회성 순차적 게임일 뿐이다. 요즘 SNS에서 부모는 평가하고 비교하는 듯한 포스팅과 댓글 들을 접하고 적지 아니 놀란 기억이 있다. 금수저, 흙수저, 금쪽이... 모두 그런 정서의 표출이다. 나는 어떤 도덕적인 규범의 기준을 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특성과 인간의 평균적인 생물학적 본성에 비추어 논리적이면서도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점을 짚어보자것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ㆍ것은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이득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도덕 규범에 대하여 혐오한다. 부연하면, 근시안적인 관점은 결국은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소탐대실이다. 남들이 바보인가?

여히간. 부모를 사랑과 배신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온화하고 자상한 부모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나는 어떤 경우에도 부모의 손을 놓을 이유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자존감이다.대개의 경우, 부모의 자식에 대한 마음은 계산 이전에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는 확인이 선다면 언제든 마음의 손을 놓아도 된다.(아마 그 대표적인 사례가 스티브잡스가 자기 아버지의 만남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일 것이다. 나는 스티브잡스를 편들거나 죄할 수 없다. 깊은 내막을 모르므로) 누구나 거의 배우지 못하고, 별 준비없이 부모가 된다. 누구나 부모가 될때. 그 막중함에  비하여 어리고, 서투르고, 나약한 상태이다. 자식에 대한 집착 혹은 애정은 진심이었지만 간혹보다는 더 자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심을 다하여 짐졌던 부모에 그 원인이었던 자식이 성패를 묻는다는 것은 너무나 경박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경박한 마음은 자신의 앞길을 헤쳐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부수적인 이득은 부모를 버리면 내가 춥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호로자식의 자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보다는 알수없는 진실을 밝힐 필요 없이 그냥 믿는 것이 낫다.(이부분은 다분히 전략적인 요소도 있다. 우리는 각자가 객관적 진실의 사도일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서 감당하기 힘든 나를 책임지느라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잘하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 나 사이에 자유의지에 의한 교환적 거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일방적 증여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양과 질을 판단할 권리는 나에게 없다. 나는 단지 신이 선택하여 부과한 나의 운명에 감사하는 것이 마땅할 뿐이다. 부모에 대한 연민과 부채감은 나 자신의 마음의 벽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벽난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 과보도 자신이 받을 것이니 굳이 말릴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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