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세상을 잘 만나 내가 가진 것들

by 쏘담쏘담

평생을 이과로 살아온 나는 요즘 철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

친구가 말했다.

"네가 의식주가 해결되고 현실적인 고민이 없어서 그런 거야."

나의 사유는 '사치'일까?

내가 고통을 겪고 있지 않으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걸까?


역사적으로 보면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생활을 책임지는 아내 '크산티페'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출근하면서 들은 유튜브에서 OECD와 세계은행, 여러 학자의 연구에서

연봉을 결정짓는 1위는 국적이고 2위는 부모라고 한다.

사실 내가 북한, 아프리카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어도 공부할 수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나의 모든 것들은 달라졌을 것이다.


사실 예전에는 내가 이룬 모든 것이 나의 '노력'이고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안정적 의식주, 지적 자본, 유전적 자산, 사회적 자본 등

많은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중 일부만 내가 만든 것이고

나머지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왔을지라도

내가 가졌던 많은 것들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외할머니 장례식에서 만났던 어머니의 사촌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분도 간호사로서 지금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멋진 분이시지만

어릴 때 임용고시를 보고 싶었는데 집안의 형편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임용고시를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한때 내가 미워하던 친척들을 장례식에서 만났을 때 그들과 나를 비교하며

우월감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의 위치를 타인의 실패와 비교하며 우월감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의 실패 위에 나의 자존감을 올려놓아서는 안된다.

내가 타인의 실패 위에 쌓았던 우월감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겸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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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이들을 평가하며 생기부를 작성하지만

나무에 빨리 오르는 시험을 본다면 물고기에게는 공정한 걸까?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물고기에게 나무에 오르는 능력으로 평가를 내린다면,

그 물고기는 평생 자신이 멍청하다고 믿으며 살게 될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롤스에 의하면 '우연히' 자기 재능을 굉장히 높이 평가해 주는 사회에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장경제에서 내 재능으로 얻는 포상은 사회가 그것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것이 내가 노력한 결과는 아니다.


나는 언어이해력이 좋고 기억력이 좋다. 오래 앉아 있는 능력은 탁월하지만

음악적, 체육적 지능은 0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단거리 달리기에서 단 한 번도 꼴찌를 면해본 적이 없다.

내가 100m 달리기를 잘해야 박수받는 세상에 태어났다면

나는 그 세상의 루저(loser)로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말을 잘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도 떨지 않는다.

나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낮고 발음이 정확한 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가 가는 목소리를 가졌다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나는 수업을 하거나 다른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연수하는 것이 수월한 편이다.

우연히 내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겸허해진다.


동생이 나에게

"누나는 실수도 잘하지만 메타인지가 높아. 그래서 누나가 좋아."라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최고의 찬사였던 것 같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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