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을 기다려 주기로 합니다

by 쏘다님


망했다.



일을 한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밤을 지새워버렸다.

모든 일들이 숨막힐 정도로 보채는데

멍텅구리배가 되어 멈춰버렸다.


곧 출항을 명령하는 신호가 울리겠지.

환하게 비춰주는 등대도

뜨겁게 박동하는 동력도 없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까.


이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고 싶은 것인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 조차

알지 못한채로

출렁이는 물결에 함께 휩쓸려간다.


눈은 뿌옇고,

어깨는 딱딱하고,

손은 떨려온다.

닻을 내려야 한다.

이대로는 출항을 할 수가 없다.

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출발을 할 수 없다는 거다.


멀미가 날 것 같은 파도 위가 아닌

단단하게 설 수 있는 대지가 필요했다.

바닥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그리웠다.

그런 물리적인 감각이 절실했다.


키잡이가 배위에서 구토나 하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선장은 내 신호를 믿고 출항 명령을 할테다.

선원들은 사력을 다해 노를 저을테다.



운동화 끈을 묶고 무작정 발을 디뎠다.

지금이 몇시인지도 모르겠고

주머니에 돈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걸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뛰었다.

희뿌연 새벽 거리를 그냥 내달렸다.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릴때까지

우퍼 소리처럼 내 온몸을 울릴때까지.

그러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여기는 진짜구나. 가짜가 아니었구나.



눈 앞으로 보이는 장미공원에는 장미가 없다.

대신 앙상한 묘목들이 죄인 마냥 짚단을 덮어쓰고 있다.

죄목은 '아직'일 것이다.

피지 못했기에 그래서 덮어두어야 하는 죄.

참 이상한 죄책감이다.

게으름과는 다른 종류의 아직이라는 죄는.


짚단을 만져본다.

아직 장미도 아닌 것이 벌써부터 까칠하다.

손끝에 따끔 가시가 박힌다.

이 통증이 오히려 반가웠다.

더이상 눈으로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촉감 밖에 없어서.

만져야만 존재하는 것이 되는

그런 종류의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불쌍했다.

이 꼬라지를 하고도

어쨌든 버티는 중인 것이 안쓰러웠다.

익숙한 모습에 비루한 공감을 덧씌운다.

그것마저 뒤집어 쓰게 해서 미안해진다.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너는 이렇게 누군가 기다려주기라도 하지,

우리에겐 기다림이라는 것 또한 죄가 된다.


이젠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재촉하는 나 때문인지.

이렇게라도 살아남아보자 손을 내민 동료들 때문인지.

기어코 우주로 날아가겠다는 정신 없는 세상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무작정 바다를 향한다.

가라앉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짚단 아래 네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너도 '이젠 피어야지'라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 있을까.

무언가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이 이상한 모습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짚단을 몇 번 더 쓰다듬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거친 촉감 속,

‘식지 않은 무엇’이 숨어 있었다.

아직 피지 않았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실재하기만 한다면 생명력은 필연적이니까.


피기 전의 것들은 죄가 없다.

그러니 아직이라는 죄명으로 벌하지 않기로 한다.

덮어쓴 채로 버티는 것들도,

충분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기회는 있을 것이라 기회를 주기로 한다.

만개할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릴 수 있게 되는 날을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5월의 장미 축제에는

너와 내가 만나 서로의 생존을 확인해보자

그렇게 약속해본다.


무수한 아직의 항목들은 아직이지만,

일단 오늘의 동력은 가시로 박혔으니,

심장 고동 소리를 북소리 삼아 출항을 해보련다.



이제, 배에 오를 시간이다.

자, 가자.



SSO.



#epilogue.

다 쏟아내고 나니

신기하게도

정말로 활력이 되는군요.





- '아직'의 축제 @ 올림픽공원 장미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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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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