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3월이니 드디어 봄,
이라고 얘기하기엔 너무 빠르다.
아직 날이 그리 따뜻한지도 모르겠고,
코스피 상승 속도는 어질어질하고(고맙긴하지만),
무엇보다 바야흐로,
3월은 정부지원사업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잤던 분야별 예산 계획이
다양한 사업 공고로 깨어나고,
덕분에 사업 기획 논의, R&R 편성, 협력사 협약 등
메일함이 먼저 꽃을 피운다.
한 마디로, 다음주 서류 마감으로 정신 없다는 얘기.
(처음부터 그렇게 말할 걸...)
여러 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에,
모니터마저 4분할 되어 있다.
업무를 던지면 네 방향에서 답이 밀려온다.
챗GPT, 클로드, 제미나이, 퍼플렉시티..
똑똑한 팀원들을 개성에 따라 넷이나 선발했는데,
문제는 너무 빠르다.
말이 너무 많기도 하고.
함께 논리를 만들고, 업무를 나누어,
복사, 붙여넣기, 재질문, 수정, 확장, 재정렬...
AI는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데,
나는 점점 로봇이 되어간다.
어깨도 뒷목도 강철처럼 딱딱해져간다.
눈을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나도 모르는 새, 네 시간이 증발했다.
팀원들의 스마트함은 고맙지만,
속도는 불친절하다.
한꺼번에 백페이지나 쏟아내면
구토가 올라올지도 몰라,
이런 배려는
텍스트 쓰나미 중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쯤되면 해일 구조 요청을 해야 한다.
뱃속에서도 모스 부호 마냥 SOS 신호가 울렸다.
일단 멈추고 일어서자.
이 놈들은 배도 안고플테니,
팀회식은 나 혼자 할테다.
구조 신호는 잠잠해졌다.
대신 다른 해일이 몰려왔다.
명료함이 나른해지고 딱딱함이 몰랑해질즈음,
어쩌면 봄일지 몰라, 싶어져
산책보다 벤치에 앉아 느껴보기로 한다.
바람이 상냥해지긴 했다.
공기 중 울리는 소리도 화사해졌고,
햇살도 채도가 확실히 올라간 듯 했다.
눈을 감으니 햇살이 온 몸에 퍼진다.
누군가 귀에 속삭이는 듯 하다.
‘나야, 봄.’
눈 안쪽으로 방문한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번진다.
이름 모를 색의 빛들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진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너의 미덕은 투명한 불완전성 같아.”
얼마전 누군가 말해주었다.
솔직함과 모자람의
콤보(라지)세트를 의미하는 듯 한데,
앞뒤 맥락이 멕이는 것 같지는 않아,
칭찬으로 일기장 한 켠에 새겨두었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반짝이는 햇살 같아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지금처럼.
불완전하다.
가끔은 과하고,
그러다 지치고,
자주 흔들리고,
아직도 서툴다.
하지만 불투명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모두가 투명해질 필요도 없다.
투명함이 다른 이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한,
불완전한 그대로가 편안한 색을 띄고 있다면,
왜곡 없이 그 빛을 통과시켜도 되지 않을까.
눈 안에서 펼쳐진
프리즘 전시회를 가만히 감상해본다.
형형색색 투명한 빛들의 향연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고
유리잔에 담아두기로 한다.
명징한 언어들로
굳이 분석하지 않고
그저 반짝이게 두기로 한다.
이제, 다시 일어서도 되겠다.
4분할 팀원들이 아무리 똑똑해도,
유리잔에 햇살을 담아본 적은 없겠지.
시커먼 활자 덩어리가 밀려들어도,
빛을 담은 유리잔이 등불이 되어주겠지.
로봇처럼 뻣뻣하게 걸어 나왔다가
빛처럼 가볍게 유영하며 돌아간다.
오늘은 걷지 않았다.
대신 빛 사이를 통과했다.
SSO.
# epilogue.
안 걸었다면서 걸음수는 뭐냐구요?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뭐 먹었냐구요?
아시잖아요. 저, 진리 추구하는 거.
- 광합성 핫플 @ 상암동 어느 벤치 (회사 이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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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음수 : 2385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