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1. 사무실 안 - 책상 위 (밤)
- 자막: 야간 피해 보고
창가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태양을 대신하는 하얗고 차가운 형광등만이
성실하게 책상을 내리쬐고 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
클릭클릭 마우스 소리 들려오고,
이를 악무는 소리도 간헐적으로 섞인다.
책상 위, 시커먼 듀얼 모니터는
그마저도 두 개씩 분할되어 텍스트를 쏟아내고 있다.
한 사람의 정신을 네 방향으로 찢어놓는
네 개의 창 앞에 앉은 한 여자, 쏘다님이다.
목을 주욱 앞으로 빼고,
깜빡임이 줄어든 눈으로 동공만 바쁘게 움직인다.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된 채,
왼손만 스르르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비닐 봉지가 열리는 소리.
CUT TO.
젤리 봉지 속, 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설탕 가루가 봉지 안쪽 벽면에 엉겨 붙어
성스러운 먼지처럼 묘하게 반짝인다.
앞줄엔 핑크곰과 오렌지곰, 중간엔 그린곰.
그리고 봉지 안쪽,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운 자리.
저만치 라벤더곰이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 열리듯,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가 밀고 들어온다.
망설임 없이 정확한 그것, 쏘다님의 왼손이다.
핑크: (너무 놀라 비명조차 실패) 끄..으.ㄱ..
어정쩡한 곳에 숨어 있던 곰 한 마리가 잡혀 올라간다.
곧이어, 쭈왑. 쭈왑. 들려오는 저작음.
핑크: 손 그림자 봤어? 나, 지금 봤어!
오렌지: (생각보다 차분) 오늘 밤도 길겠네.
그린: 그럼, 다시 시작된 거야?
세 곰 동시에 멈칫, 봉지 안쪽을 바라본다.
한 박자 늦게, 라벤더곰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라벤더: 돌아온 거지.
정적.
뒤이어, 저작음, 한 번 더 길어진다.
그 위로,
- TITLE IN/OUT <연쇄살웅범을 고발합니다>
S #2. 사무실 안 - 책상 위 (밤)
- 자막 : 행동 패턴 분석
다른 날 밤이지만,
칠흑같은 창가와 태양 같은 형광등은 여전하다.
쏘다님도 여전히 화면을 본다.
아니, 화면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참 같은 줄을 읽고,
다시 같은 줄을 훑는다.
눈은 앞으로 가는데, 생각은 조금 뒤에 남아 있는 것처럼.
책상 위에는 오늘의 전리품들이 흩어져 있다.
텀블러 속, 미지근함조차 잃어버린 커피.
미스터리 크롭서클 같은 도형이 가득한 메모 노트.
뚜껑이 열린 채 방치된 만년필.
인공 눈물병과 구겨진 크리넥스 티슈들.
그리고, 반쯤 비어 있는 젤리 봉지.
그녀는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굴리다가,
왼손으로 다시 봉지를 더듬는다.
시선은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지만,
손끝은 봉지 속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한 마리. 쭈왑. 쭈왑.
또 한 마리. 쭈왑. 쭈왑.
그리고 또 한 마리.
정확하다.
무심하다.
잔혹하다.
핑크: 저 인간, 우리 얼굴도 안 보고 집어.
그린: 보면 미안해질까봐?
오렌지: 아니, 익숙해서겠지.
이어지는 저작음, 길기도 길다.
씹는 소리라기보다
턱 근육이 오늘 하루를 복기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핑크: ...어제보다 오래도 씹네.
봉지 안쪽에서 부스럭 소리난다.
미세하게 접힌 비닐 너머로 라벤더의 목소리 들려온다.
형광등 빛이 한 번 흔들린다.
라벤더(OFF): 그렇다면 대체로 인간 세계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날이다.
오렌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바라보면, 라벤더곰 얼굴 드러난다.
라벤더: 경험.
그린: 근데 이상해. 왜 꼭 밤에 먹어?
오렌지: 낮에는 바빠서 정신이 없겠지.
세 곰, 다시 라벤더곰을 바라본다.
라벤더곰, 잠시 침묵한다.
봉지 바깥에서 마우스 클릭 소리, 한 번 더 들려온다.
세 곰, 손이 들어올세라, 몸이 잠시 움찔 한다.
라벤더: 밤이 되어야 인간들은 비로소 자기 불안을 씹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 같은 곰이 필요한 거지.
정적.
핑크: ...기분 나빠야 하는데, 좀 이해 되네.
오렌지: 그게 인간이지.
S #3. 사무실 안
3-A.
- 자막: 위험 징후 관찰 1. 무저작 상태
유리창엔 또 다른 검은 밤이 달라붙어 있다.
창밖으론 불 꺼진 건물들과
무심한 도시의 빛들이 멀찍이 떠 있다.
쏘다님은 오늘 이상하다.
봉지를 열어놓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대신 창밖을 오래 바라본다.
핑크: 나, 오늘, 살았나봐!
오렌지: 기다려. 아직 모른다.
봉지 안쪽, 라벤더곰 앞,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설탕 결정이 묘하게 반짝인다.
라벤더: 이런 날이 더 위험하다.
핑크: 그러게. 조용하니까 더 무서워.
진짜 조용.
라벤더는 창밖을 보는 그녀를 한참 본다.
라벤더: 곰을 씹는 날보다 곰을 외면하는 날이 더 위험하다.
그린: 안 먹는 게 왜 더 위험해?
라벤더: 이런 날엔 인간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그린: ‘생각’하면 다시 먹어?
라벤더: ... 보통 그 다음엔 운다.
정적.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래, 너무 오래.
봉지 안의 곰들도 숨을 죽인다.
3-B.
- 자막: 위험 징후 관찰 2. 턱통증 호소
이번엔 왠일로 아침이다.
화창한 햇빛 따위가 아닌,
어젯밤의 피로 위에 오늘 아침이
무심하게 덧칠된 느낌이다.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쏘다님,
불편한 듯 턱을 문질러본다.
입을 크게 벌려보려다 이내 포기한다.
서랍을 열어 단백질 쉐이크 하나를 꺼낸다.
쉐이크를 열심히 흔드는 쏘다님의 손,
열려 있는 봉지에는 다가오지 않는다.
핑크: 뭐야, 다이어트래?
그린: 어젯밤 그렇게 먹어놓고?
오렌지: 설탕 해장이라며 중간에 컵라면도 먹었었지.
핑크: 그래놓고, 왜 저러니?
세 곰, 동시에 봉지 안쪽을 바라본다.
라벤더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라벤더: 자기합리화는 인간의 주식이지.
정적.
3-C.
- 자막: 위험 징후 관찰 3. 평화적 살웅
회상-몽타주.
책상 위 테라리움 그릇.
그 안에 나름 잘 조성된 이끼 숲.
돌멩이 하나, 작은 피규어 하나.
아니, 나름의 연출이라며 세워둔 ‘곰’이다.
며칠 후.
이끼에 물을 주는 쏘다님.
꽤 진지한 얼굴이다.
마음 한 켠, 평화를 키우는 사람처럼.
겨우 얻은 초록 한 줌을 지키려는 것처럼.
CUT TO.
곰 한 마리가 반쯤 녹아 있다.
테라리움 숲 속 ‘곰’출몰의 주인공, 그 젤리 곰이다.
핑크(OFF): ...녹여 죽였잖아!
그린(OFF): 저걸 평화라고 하던데?
오렌지(OFF): 좋은 뜻으로 한 일이 제일 무섭다니까.
라벤더(OFF): 인간들은 늘 좋은 뜻으로 이상한 짓을 한다.
정적.
S #4. 사무실 안 - 책상 위 (밤)
- 자막: 생존 운영 지침
봉지 안이 헐거워졌다.
공기가 달라졌다.
누군가의 부재는 늘 공간으로 먼저 드러나는 것처럼.
이제 곰은 몇 마리 남지 않았다.
손을 넣으면 봉지 끝에 닿을 만큼,
밤이 많이 진행되었다는 뜻이다.
핑크: 나 오늘은 안 먹힐 거 같아.
그린: 왜?
핑크: 저 인간, 항상 하나를 남겨. 오늘은 나일 거 같아.
오렌지: 맞아. 마지막 하나는 늘 안 먹더라.
그린: 왜?
오렌지: 글쎄… 잔혹함의 미학?
멈칫.
세 곰, 천천히 봉지 안쪽 눈치를 본다.
셋의 소란이 닿지 않는 깊이의 라벤더곰, 평온한 표정이다.
라벤더: 아니, 계산이다.
그린: 내일 먹으려고?
오렌지: 고작 곰 한 마리로?
라벤더: 오늘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자기 자신에게 남겨두는 신호다.
짧은 정적.
라벤더: 아직, 버틸 게 더 있다는 뜻.
핑크: ...우리도 버티고 있는데?
오렌지: 나름 공동 수행이네.
그린: 그럼 마지막 곰까지 먹는 날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라벤더.
봉지 바깥에서
쏘다님의 손끝이 봉지 근처를 맴돈다.
잡을 듯 말 듯.
무너질 듯 말 듯.
라벤더: 그런 날은 인간 세계에서 정말 큰 일이 있었던 날이다.
정적.
모든 곰이 조용해진다.
S #5. 사무실 안 - 책상 위 (밤)
- 자막: 긴급 속보
이어지는 곰들의 정적.
모니터 불빛.
식어버린 커피.
끝나지 않은 문장들.
정신없는 출력 파일들.
그리고 반쯤 열린 봉지 안의 마지막 사투 흔적.
그린: 그럼, 큰일이네. 아직 안 끝났으니.
오렌지: 애초에 끝난 적이 있었나.
곰들, 잠시 숙연해진다.
우드득. 빠직.
그 순간,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 들려온다.
핑크: 방금 또 새 봉지를 뜯었어!
CUT TO.
새 봉지 속 곰돌이 POV.
봉투가 하늘처럼 벌어진다.
그 사이를 비집고,
인형뽑기 집게처럼,
대형 크레인처럼,
망설임 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녀의 손가락.
화이트: 비… 비상이다!
경악과 공포가 가득한 화이트곰의 얼굴 위에서,
암전.
Fin.
SSO.
#epilogue.
이번 주는 걸음보다 곰의 희생이 더 컸습니다.
다음 주엔, 사람답게 좀 걸어보겠습니다.
- 그들만의세상 @ 하리보 골드베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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