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살을 가르는 맛도 미슐랭급이었지

by 쏘다님


엥?



이해합니다.

지금 그 표정. 그 말투.

'네가? 수영선수?' 라는 리액션은,

하리보와의 오랜 애착 관계 형성이나,

빵에 대한 노스텔지어가 빚어낸 결과일 수 있겠지마는,

원래 운동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멈추면

많이 불어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문제는 그 볼륨을 너무 오래 간직해서이겠지만.



그렇다.

난 소싯적 엘리트 체육 교육을 살짝(?) 받고

장렬히 나가떨어진 주니어 수영선수였다.


아빠 때문이었다.

본인이 의장대였으니 나도 악기를 불 줄 알아야한다 했고,

급할 땐 팰(?)줄도 알아야 한다며 검도를 시켰다.

술도 잘마셔야한다며 중학생에게 주도를 가르치더니,

수능 날 아침엔 귀한 거 먹고 가야한다고

인삼주 한 잔을 내밀며 '화이팅!'이라고 했다.

우리집에선 이 정도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정한데 간지럽지는 않았고,

실용의 탈을 썼으나 묘하게 낭만적인데다가,

엉뚱한데 본인은 대체로 진지했다.

그러니 내가 다섯 살때,

사람은 물에 빠지면 나올 줄 알아야 한다며

수영장에 던져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아한 신사임당같은 엄마를 닮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헐렝한 장군같은 아빠를 닮아버렸다.

기질은 그렇다치고,

문제는 힘도 좋았다.



그 힘으로 물을 잡고 밀어내니,

앞으로 쭉쭉 나가는 것은 당연했다.

몸을 타고 물이 밀려나가는 그 느낌,

쭈욱 앞으로 치고 나가는 그 속도,

그게 그렇게나 좋았다. 맛있었다.

숨 참고 가라앉아 잠수하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성미에 딱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선수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수영장에서는 그랬다.

바다에 나가기 전까지는.


일 년에 한 번은 바다 도영을 해야했다.

힘도 좋고 기술도 있으니 뭐그리 대단하겠나 싶었다.

하지만 바다는 수영장처럼 맛있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세계였다.


게다가 내 차례는 어둑어둑해져야 돌아왔다.

칠흑같은 바다에 물살도 잘 안 보이는데,

내가 들어가야만 한다고 했다.

이유는 잘 보여서란다.

너무 하얗기 때문에 빛을 반사해서 어디있는지 딱 보인단다.

어느 정도인지 비키니 증거사진을 제출하도록 하겠다.

(긴장하지 마십쇼. 저도 염치는 있습니다)


(빛 반사형 인간의 초기 형태 - 저를 찾으실 줄 믿습니다)



바다 도영 때는 배가 따라 붙는다.

그 위에는 대기하는 선수들과 코치가 있고,

해파리가 쏠 수도 있으니,

배 측면에 붙은 미니 양식장 같은

그물 안에서 헤엄을 쳐야한다.

밤에는 전등도 켜주는데,

그 느낌이 마치

오징어잡이배 곁에서 헤엄치는

대왕 오징어가 된 느낌이랄까.


그러니 무서울 것은 없었다.

일단 해본다.

일단 내린다.

일단 가른다.

그런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이게 나아가질 않았다.


어깨힘을 더 주고,

물도 더 잡아보고,

킥도 더 올려봤지만,

계속 제자리였다.

그나마 지키던 제자리도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힘으로 밀어 붙일 성질이 아니었다.

내 힘은 이 세계에서는 통하질 않았다.

정신없이 휘적이다 힘이 빠져버렸다.

얼굴이 씨뻘개질 정도로 열이 올라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싶어져 서 버렸다.


"다했냐?"


씩씩대고 있는 내 뒤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무언가가 앞으로 툭 떨어졌다.

그걸 먹고 좀 쉬란다.

까만 물결 위에 둥실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보다, 먹어치웠다.

(이 빵 아십니까? 비슷한 연배로서, 반갑습니다)


보름달이 사라질 때즈음 다른 것이 둥실거렸다.

내 몸이 앞으로 뒤로 살랑대기 시작했다.


"이제 파도가 좀 느껴지냐?"


그래. 뭘 좀 먹으니 느껴졌다...는 아니고,

멈추고 힘을 빼니 확실히 느껴졌다.

앞으로 뒤로 내 몸을 움직이고 있는

그 파도란 놈이.


"앞에서 밀려오면 힘을 빼고,

뒤에서 밀어주면 살짝 힘을 줘라."


참 빨리도 얘기해준다, 싶었지만,

그래도 얘기해준 게 어디냐 싶어

덥썩 시키는대로 해보기로 했다.

파도가 앞으로 밀려올 땐 힘을 뺀다.

뒤에서 밀어줄 땐 물결 위로 올라타 힘을 준다.


'되네?'


앞으로 쑤욱 밀려갔다.

그간 쓴 힘의 반도 안되는 동력으로

말도 안되게 앞으로 나아가버렸다.

파도를 무시하고 내 힘만으로 휘젓던 때와 다르게,

파도를 읽으며 기다렸다 함께 밀려갈 때는

진짜 헤쳐나간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수영장은

내 힘으로 물살을 가르는 느낌이 맛있었다면,

바다는

거칠고 짭짤하지만 리듬을 타는 맛이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둘 다 맛있다는 얘기다.

오롯이 물살을 가르는 맛도 좋았지만,

리듬을 타야만 나아가는 물도 있는 거니까.


하리보(곰돌이들아, RIP)도 맛있고,

빵(특히, 퀸아망)도 맛있지만,

이젠 그 맛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파도가 밀려왔고,

보름달도 먹었고,

힘을 빼고 기다렸고,

뒤에서 밀겠다는 동료들도 있으니,

이제는 내가 살짝 힘을 줄 차례다.



어디,

맛 좀 볼까?



SSO.



#epilogue.

사실 요즘 수영장에 못 갑니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맞는 수영복이 없습니다.

물살을 가르며 살아가겠단 사람이

결국 수영복 때문에 멈춰섰군요.

올 여름엔 기필코

이 비애를 청산하겠습니다.






- 비애의 장소 @ 올림픽수영장 앞, 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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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랩수영 : 0m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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