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헤세(박광자 옮김)
책의 제목이 부처(Budda)가 아니라 싯다르타(Siddhartha)인 것은 극단적 금욕과 쾌락을 경험하면서 자신과 당당히 대면하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인간 싯다르타의 모습에 작가가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인간 싯다르타의 마음을 통해 간명하게 엿볼 수 있는 책으로 불교에 관심이 없더라도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우리 모두의 숙제를 풀기 위한 참고서로 일독을 권합니다.
이 책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불교적 관점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고 같은 강물이지만 매 순간 새롭다는 동시성과 단일성을 표현하여 삶의 본질에서 시간의 실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일체의 번뇌와 두려움도 시간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착각에서 일어나니 삶과 죽음도 하나요, 오직 자신과 대면하면서 현재에 집중하라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결국 “물질과 관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도 결국 노력을 통해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개인 차원의 마음의 평화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허하고, 불안하고, 분노를 느끼게 되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찾기를 원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노력보다는 명상과 관찰을 통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번뇌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화두를 가지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행동할 수 있어야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도자들이 고행이나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이유도 결국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 아닐까요?
싯다르타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고 깊은 내면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어린 시절 신학교에 다닌 적이 있고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한 부모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헤르만헤세(1877-1962)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돋보입니다.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 불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 부처의 일생에 대한 지식과 결합되어 싯다르타를 탄생시켰습니다. 삶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이해가 싯다르타의 말로 진수가 표현되면서 마치 불교 경전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듣고 있는 착각에 빠져듭니다.
원래 싯다르타는 부처(Budda, 깨달은 사람)의 출가 전 이름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두 명의 다른 인물로 그려집니다. 소설 속에서 깨달은 자와 구도자로서 두 사람이 조우하기도 하는데, 부처가 깨달음을 통해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 대중에게 설법한다면 싯다르타는 인간의 영역에서 자신의 마음속의 불성을 찾아가는 구도자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60여 년 싯다르타의 구도의 길을 사마나(고행자)로서 친구 고빈다, 육욕을 가르쳐 준 연인 카말라, 그리고 뱃사공 바수데바 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강 이쪽에서 고행을 하고, 강 저쪽으로 건너가 도시에서 감각을 탐하고, 마지막으로 강가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어 공간적으로도 세 곳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의 핵심은 역시 ‘강물’로 표현되는 세상의 동시성과 단일성입니다. 강물은 흘러가지만 제 자리에 있으며, 언제나 같은 강물이지만 매 순간 새로운 강물인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중심적 개념과 이분법적인 정의에서 실존하지 않는 시간의 개념을 삭제하면 모든 것은 분별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배제하고 하나로 보면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이요, 선도 악이고, 악이 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흐르는 강물처럼 현존하는 것이 전부인 것이지 과거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합니다.
동시성과 단일성의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현재에 머무르는 지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아들에 대해 우쭐대는 아버지의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 장신구를 위해서, 그리고 남자들이 자신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자들의 맹목적이고 거친 욕망, 이 모든 충동, 이 모든 어린애같이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지만 엄청나게 강렬하고, 억센 생명력을 가진, 끝까지 관철시키고 마는 충동과 탐욕이 싯다르타에게는 더 이상 어린애 같은 짓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았고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엄청난 것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하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엄청난 것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런 이유에서 그는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들의 모든 욕망, 행위에서 생명, 생동하는 것, 불멸의 것, 브라만을 보았다.”
“나의 자아, 내가 살아있다는 이 수수께끼, 내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 다른 사람 아닌 싯다르타라고 하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 자신에 관해서, 싯다르타에 관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아는 것이 없다.”
“강이 흐르고 또 흘러 영원히 흘러가지만 언제가 거기에 있으며, 언제나 같은 강물이며 순간마다 새롭다.”
“일체의 번뇌는 시간이 아닌가,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도 시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은 인간이 시간을 극복하는 그 순간, 시간이란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순간 제거되고 극복되지 않을까?”
“한 인간이 한 행위가 전적으로 윤회하거나 전적으로 열반인 경우는 결코 없고, 인간이 완전히 신성하거나 완전히 죄악으로 가득한 경우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시간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빈다. 나는 이것을 여러 번 거듭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현세와 영원 사이, 번뇌와 행복 사이, 선과 악 사이에 가로 놓인 것처럼 보이는 간격은 결국 착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