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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라킴 Jul 30. 2021

나의 외가

큰외삼촌을 추억하며

나는 어릴 때부터 친가 근처에 살아서 외가에 대한 추억이 많이 없다. 아빠가 그 당시 아버지들보다는 처가에 자주 가는 편이었지만 당시 외갓집은 산동네에 있어서 아파트촌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어딘가 생소한 공간이었다. 외할머니 집에 가려면 무서운 개들이 짖어대는 산비탈을 올라가야만 했고, 골목길엔 어딘가 모르게 축축한 시멘트 냄새가 났다. 따뜻한 물도 잘 나오지 않아서 씻는 것도 불편했고, 외풍이 심한 방에서는 자는 것도 쉽지 않아서 나는 외갓집에 가는 것을 그리 반가워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님으로 내가 4살쯤 되었을 때 뇌출혈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에 대해 남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나중에 엄마나 사촌언니들한테 들은 이야기만이 할아버지를 설명해줄 뿐이었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매우 조용하면서 무뚝뚝한 경상도 분이셨다. 명절을 제외하고,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마다 외갓집에 갔지만, 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향해 크게 웃어주시거나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시진 않으셨다. 우리를 보며 가끔 “우리 강아지~왔나” 하면서 엉덩이를 두드리시거나, 우리가 온다고 수입식품점에서 사두신 미제 초콜릿 봉지를 조용히 내미는 게 할머니가 해 준 애정표현의 전부였다. 하다못해 우리가 사는 곳에 놀러 오신 적도 없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멀미가 심해서라고 이야기해줬지만, 시내버스만 타면 넉넉잡아 두 시간가량의 거리인데 못 온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할머니는 딸이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다 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마인드여서 그러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우리보다는 사위인 아빠를 더 반가워해주셨다. 좋은 이불, 맛있는 반찬은 다 아빠 앞이었고, 겨울에 따뜻한 물이 잘 안 나올 땐 정성스럽게 데운 물은 꼭 아빠 먼저 써야 했다. 행여나 우리가 먼저 먹으려고 하거나, 아빠한테 그것 좀 달라고 해도 할머니가 '저건 아빠가 먼저'고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에 외갓집에서 우리는 항상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그다음은 엄마. 엄마는 외할머니네 가면 유독 잠을 많이 잤는데. 새벽에 곤히 자고 있는 엄마한테 우리가 매달려서 떼를 쓰거나 깨우려고 하면, 할머니가 어디선가 달려와서 무서운 표정으로 "엄마 자야 되니까 조용히 해야 된다!"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자고 있는 엄마의 몸을 구석구석 주물러주곤 하셨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보니 왜 그때 할머니가 아빠한테 그랬는지, 왜 우리를 꾸짖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릴 때는 할머니의 단호하고 무서운 표정이 잘 잊히지 않아서, 할머니는 우리를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었다.


할머니는 같이 모시고 살겠다는 큰외삼촌의 권유도 뿌리치고 산동네에서 작은 기도원을 운영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삼으셨다. 몸이 약해지고, 결국 정신이 흐려지시기 전까지 기도원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사셨다.  


그나마 외가에 갈 때 가장 재밌었던 것은 할머니 댁 근처의 큰 외삼촌네에 가는 것이었다. 외삼촌은 큰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지셨는데, 약간의 허세가 있으셔서 그 말투며 행동이 재미있었다. 내가 가면, “ㅇㅇ이 딸, ㅇㅇ이가 왔나?” 하시면서 “자 니 쓰라”하고 용돈도 척 주시고, “내가 니 온다고 어제 시장에서 제일 비싼 고기랑 반찬이랑 다 샀다.” 하면서 생색도 내셨다. 그리고 외숙모는 요리를 정말 잘하셨는데, 외삼촌네 갈 때마다 소갈비에 메밀전, 각종 나물들이 가득 차려진 잔치상을 대접받았다. 그때 먹었던 소갈비가 얼마나 맛있던지! 나랑 내 동생이랑 밥을 몇 그릇이나 비웠는지 모른다.


외삼촌네 갈 때만큼은 아빠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먹는 것도 우리 먼저, 노는 것도 우리 먼저였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셔서 가끔 삼촌이 하는 소리를 잘 못 알아듣긴 했지만, 우리가 귀엽다고 우리를 번쩍 들어서 목마도 태워주고, 비행기도 태워주고 그러셨다. 아빠가 좀 마른 편이라 목마나 비행기같이 몸으로 놀아주는 건 잘해주질 못했는데, 삼촌은 키도 180cm가 넘었고 힘도 쎄셔서 그런 걸 다 해주실 수 있었다. 특히 나는 또래보다 키가 좀 커서 다 큰 어른 취급을 많이 받았다. 집에서는 '너 너무 커서 업을 수가 없어', '목마는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야'라며 잘 안 해줬는데, 외삼촌 집에 가면 아직 아기 취급을 받으면서 언제든 업히고 들리고 할 수 있어서 그 느낌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맏이였던 큰외삼촌과 막내인 엄마의 나이차가 꽤 났기 때문에 사촌들과 우리들의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우리가 초등학생 때, 그들은 벌써 대학생이었으니까. 그래서 외삼촌네 가면 대학생 사촌언니나 오빠를 볼 수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화장하고 예쁜 옷을 입고 다니는 언니, 오빠가 참 멋있게 보였다. 한창 꾸밀 나이의 언니들은 나랑 내 동생의 머리를 예쁘게 묶어주기도 하고, 재미로 화장도 좀 해주고 그랬다. 엄마가 잘 꾸미지도 않으셨고, 똥손이라 나랑 내 동생 머리 스타일은 하나로 질끈 묶거나 삐뚤빼뚤한 양갈래 머리 정도였는데, 외삼촌네 가면 언니들이 머리를 정성스럽게 땋아주고, 고데기로 꼬불꼬불 파마머리처럼 만들어주기도 하고. 너무 예쁘다고 칭찬도 해줘서 내가 정말 공주님이 된 것 같았다. 사촌오빠는 음악을 전공해서 악기를 많이 다룰 수 있었는데, 우리가 가면 피아노나 기타를 쳐주곤 했다. 당시 사촌오빠는 잘생겨서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굉장했는데(집에 가면 여학생들한테 받은 선물들이 놓여있을 정도...), 어린 나이에도 잘생긴 사람은 알아본다고.... 사촌오빠가 우리가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간식 같은걸 주면 굉장히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중고등학생이 되고 공부 때문에 외갓집에 가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부터는 큰 외삼촌네에 방문하는 횟수는 더 줄어들었고. 그것마저도 내가 결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거의 가지 못하였다. 명절에는 시가에 가야 해서 못 가고, 외할머니 기일도 엄마와 아빠만 갔었기 때문에 외가와 나는 거의 단절되었다. 외삼촌 소식은 엄마를 통해서 듣거나, 아님 엄마한테 보내주시는 김치와 된장, 고추장 정도로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올여름, 큰외삼촌이 담낭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단 소식을 들었다. 워낙 많이 진전되어서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고, 편안하게 가실 때까지 집에서 모시라고 했단다. 작년까지만 해도 80세의 나이에도 푸시업을 하실 정도로 건강하시고, 밥도 잘 드셨다는데. 이렇게 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사촌언니나, 오빠, 엄마, 아빠 모두 임신 중인 나에게는 잘 말을 해주지 않았다.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생각만 해야 하는데, 괜히 안 좋은 소식을 듣고, 안 좋은 모습을 보는 게 나와 아기한테 영향이 갈까 봐, 다들 너는 신경 쓰지 마 하며 얼버무리고, 외삼촌네에도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만날 기회가 있었을 때 엄마랑 같이 찾아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는 여름휴가라 빨리 바닷가 가는 게 급해서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가라는 엄마의 말을 거절했었다.


왠지 돌아가시기 전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지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는 장례만 치르고 딱 왔던 것이 외삼촌은 그렇게도 꼭 봐야겠냐며 가서 괜히 충격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고 타박했지만. 뭔가 큰외삼촌은 나에게 내가 가진 외갓집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자, 나와 외가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끈 같은 느낌이라 마지막 인사라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외삼촌이 돌아가시면, 이제 진짜 내가 외갓집에 갈 이유가 없어질 거 같았다.  


가지 말라는 모두를 뿌리치고, 엄마와 남편을 끌고 큰외삼촌 댁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외삼촌을 보았다. 병 때문에 큰 몸집은 반이 되었지만, 와줘서 고맙다고 아기를 가져서 정말 잘 되었다고 좋은 말씀도 해주셨다. 야윈 모습에 눈물이 났지만 마지막으로라도 이렇게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고, 아기를 가졌다는 좋은 소식을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전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예전에 외삼촌댁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그 때 큰외삼촌이 어린 나에게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해주시지 못했던 것을 대신 해주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외삼촌네 집은 어렸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 늙으셨지만 여전히 다정하고 친절한 외숙모도 계셨고, 장독대랑 꽃 화분도 그대로였고, 집 앞 수돗가에는 삼촌이 들고 운동하시던 아령도 놓여있었다. 큰외삼촌께 인사를 드리고 나오면서,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를 삼촌집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2주 뒤, 큰외삼촌이 소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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