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표지

이제야 안녕! 이천이십 년의 나

by 초록씨

"언니, 또 전화했어."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결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대화,

해석이 불가능하던 말들,

무례한 제안과 진심이 담긴 감탄,

그리고 돌연히 결별을 선언하던 순간...

무엇 하나 쉽게 꿰어지지 않는 장면들이다.


며칠을 인물과 감정 탐구에 매진한 결과,

우리는 조금씩 씹고 뱉고 삼키면서 소화를 해내고 있었다.

소화가 진행될수록 그녀는 분노를 느꼈고 그 자체가 당황스럽고 버거운 모양이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분노는 강렬하게 살아 있었다.

짧은 메일에 담긴 그녀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은 며칠이 지나도 선명했다.

이 감정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은 그녀가 아픔과 괴로움을 느낄 것 같아서 마음이 내내 쓰였다.


슬픔, 분노, 불안, 쓸쓸함...

나는 이런 빛깔의 감정들을 '부정적' 감정들이라 불러왔다.

'긍정적'에 대비되는 뜻으로 이름하였었다.

그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강렬하게 지배하던 시즌이 있다.

이천이십 년 이 월, 나는 아홉 해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회사에서의 마지막은 참으로 좋지 않았다.

겪지 않았다면 좋았을 일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표정들, 듣지 않았다면 참으로 좋았을 말들이 폭풍우처럼 덮쳐왔다. 결국 마음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아프기 시작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그 회사에서는 월요일 오전 9시에 전체 직원들이 참여하는 회의가 있었다. 좁은 회의실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 나는 그 안에서 두 팔로 내 몸을 꾹 누르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사람처럼 고성을 지를지도 모른다고, 내 이성으로는 절대 원하지 않는 더러운 단어와 문장들을 마구 쏟아낼 것 같은 두려움이 회의 시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회의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라였고 사람들의 얼굴도 쳐다볼 수 없었다. 아, 이러다가는 큰일 나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나는 사직을 하였다.

이후로도 그날들의 나를 제대로 마주하는 일은 어려웠다. 해결되지 않는 감정은 물음표로 남아서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따금 그날들이 떠오르면 나는 울었고 분노하였고 미워했다. 그날들의 내가 싫었고 그곳 사람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녀는 일을 함께 도모하던 이들과 작별하기로 결정했다.

이천이십 년의 나는 효자동을 떠났다.


성경을 읽는 중에 '이상한' 구절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인데, 예수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헤롯왕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을 갔다. 후에 천사들을 통하여 헤롯왕이 죽었다는 소식과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마리아와 요셉은 헤롯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고향에 가기를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작은 동네 나사렛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구절이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리아와 요셉의 '두려움'이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는 길이 된다는 게 처음에는 영 이상했다. 나에게 두려움은 부정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요셉과 마리아의 두려움이 신이 계획한 일들을 이루어가는 길과 표지와 안내가 되었다. 그렇다면 아픔과 슬픔, 분노와 불안이라는 감정들을 과연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퍼런 빛깔들의 모든 감정들을 다 그렇게 해석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이런 감정들이 인생의 길이 되어주고 표지가 되고 안내의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끄덕인다.

이천이십 년의 나를 긍정한다.

나는 그러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였고

그 길에서 돌아 나와야 하는 순간에 이른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

너의 분노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네가 나아가는 길에 또 다른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가 되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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