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남편의 노트북은 회사 소유다. 고로 퇴직할 때 반납해야 하는 물건 중 하나다.
보안 살벌한 회사 노트북으로 얼마나 신랑 개인 업무를 할 수 있었겠냐마는, 20년 넘게 함께한 노트북에는 분명 신랑의 개인 정보와 문서가 적지는 않을 것이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신랑은 아마도 개인 정보를 삭제하거나 백업하느라 정신없는 듯했다.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긴 하지만 흩어져있는 파일을 찾는 것도 일일 테니까... 게다가 회사에서 업무 중에 개인용무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일 테고...
뭐 암튼 퇴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침부터 거실을 채운 키보드 소리에 나는 이불속에서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비록 여름휴가 여행을 떠나지는 못했지만 집에서 혼자 하던 것들을 남편과 함께 하고 있으니까.
점심 같이 먹기, 거실 소파에 나란히 붙어 앉아 TV 보며 수다 떨기, 평일 마트에서 카트 끌고 다니며 장보기, 한적한 오후 콩 산책 시키기, 오후 느지막이 낮잠 자기. 이 모든 순간이 꿈만 같아서 새어 나오는 행복한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소중했다. 남편은 뭔가 복잡한 파일들을 정리 중인 것 같았지만, 나는 그저 이 ‘함께’하는 시간에 취해 있었다.
’ 나의 집캉스 (feat. 남편)‘는 대만족이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하루들 속에서,
나는 그저 남편이 노트북을 반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의 시간을 정리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무심코 지나친 남편의 노트북 화면에는 낯익은 문서가 띄워져 있었다.
나도 잘 알고 있는 이력서 서식이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끝이 얼어붙는 것처럼 굳어졌고, 가슴이 무겁고 먹먹해졌다.
뒤이어 따라온 것은 걷잡을 수 없는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그동안 내가 듣던 키보드 소리는 단순한 정리가 아니었다.
남편은 말없이,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내가 불안해할까 봐,
혹은 미안해할까 봐
혼자서 묵묵히 감당해 온 외로운 시간들이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내가 너무 무심하게 웃고 있었던 것만 같아서,
불투명한 미래에 갑자기 던져진 우리 현실이 속으로는 얼마나 복잡하고 무겁고 두려웠을까 싶어서.
그런 남편 옆에서 마냥 해맑게, 철없이 굴었던 나는 철없는 바보였다.
그날 밤,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TV를 보며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나처럼.
홀로 미래에 대한 책임을 고민하고 있었을 남편.
그 짐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을지,
내게 불필요한 걱정을 안겨주지 않으려 했던 남편의 깊은 배려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저 옆에 앉아 남편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옆에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철이 없었다.
한동안 그 죄책감과 미안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부터라도 그의 가장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철없이 굴었던 과거는 인정하되, 이제 더는 그저 옆에 앉아 있기만 하는 아내가 아니다.
남편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느끼는 무게감을 내가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내가 그의 짐을 함께 짊어지고,
그의 옆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랜턴이 되어 응원할 것이다.
우리는 가끔,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지나고 있다는 걸
말이 아닌 공기로,
표정이 아닌 기척으로 느낀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이 있고,
말할 수 없어도 알아지는 마음이 있다.
나는 요즘
더 자주 남편을 바라본다.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조금 더 자주 웃고,
조금 더 오래 곁에 있으려 애쓴다.
시간이 흘러도 오늘의 우리는,
서로의 가장 든든한 편이었던 시절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