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밑줄 긋기
다리 위에는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멀리서만 봐도 두근거리는 불빛이 일품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미화 레코드의 선배도, 대학 친구도, 그리고 한때 만났었던 인연도.
새벽이 오고 첫차가 다닐 때가 되면 가끔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던 일행과 버스를 타고 양수리까지 내달렸다. 강물 위로 해가 오르는 것과 햇살이 내려앉는 것을 차례로 본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꾸벅꾸벅 졸면서 돌아와 시 수업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상하리만치 혼자 오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던 포장마차였다. 어떻게 혼자 술을 마실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한 나머지 혼자 포장마차에 들어가 술을 마셔본 적이 있는데 꽤 고통스러웠다. 혼자 마시는 술은 이상하리만치 쓴맛이었으며 궂었으며 금방 취하기까지 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상당 부분 것들이 제거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그 다리 위 포장마차에서 누군가와 술을 마시며 첫눈이 오면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달랑 그 약속만 기억날 뿐 그 약속을 누구랑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겠지. 하기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런 말을 할 리는 없었겠지.
그곳은 그런 곳이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버릴 감정들로 배불렀던 곳. 언젠가는 나에게도 곧 멋진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로 수면 위에 내려앉은 밤불빛들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았던 곳.
포장마차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다리 주변으로 낯설면서도 경박한 바람이 불고 있지만, 이제 그 바람은 베어낸 천변의 버드나무를 춤추게 하지 못하고 나를 붙들어 세우지도 못한다.
체기가 많았었고 그래서 뭐든 간절했던 시절에 나는 다리를 건너 다녔다. 오갈 데를 몰라하느라 공중에 오래 떠 있는 깃털 같았던, 쉼 없이 부풀어 오르는 빵 반죽 같은 시절에 말이다.
아마도 어쩌면 인연이 닿는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내게 연락을 해서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때 네가 나한테 그랬는데. 첫눈 내리면 그 포장마차에서 만나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리. 첫눈 내린다고 치고, 아직도 포장마차 있다고 치고, 우리 그 다리에서 지금 만나면 어때?
참, 거짓말 같은 시간이었다. 참, 거짓말 같은 시간이어서 그토록 환했다.
(330 -334 page 작은 다리 위 누구나 그런 시간이 있었다 중에서)
어떻게 그와 그 책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여행과 에세이라는 두 단어의 만남으로부터 끌렸을 것이다.
그의 산문집 <끌림>을 먼저 만났고 이 책이 두 번째.
꽤 많은 메모를 했을 정도로 보석 같은 문장들이 많았다.
그중에 위의 단락을 고른 것은 아마도 '포장마차' 때문이리라.
결혼 전에 여친이 없을 때도 자주 이용한 포장마차였지만 술을 잘 못하는 지금의 아내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데리고 다닌 곳이 포장마차.
조선시대 주막집 여인 같았던 포차 마담의 헤픈 웃음이 싫진 않았고 그 침침하고 출렁대는 분위기는 오히려 넉넉했으며, 바로 옆에서 아옹거리는 처음 보는 술친구들이 왠지 편안했다.
청춘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동전과 구겨진 지폐와 시꺼먼 먼지들이 탁자와 의자 그리고 바닥에서 헤벌레 거리며 술과 범벅이던 그곳.
때로는 사랑가가 또 때로는 투쟁가가 울려 퍼지던 그곳.
술과 친하지 않은 여친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도(酒道 )를 주절대던 나의 꼬부라진 혓바닥도 나름 제 몫을 했던 그곳.
그런 추억들이 위 문장과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었다.
1980년대 후반의 포장마차는 바람만 조금 불어도 휭하니 날아가버릴 정도로 하늘거렸던 감정들이 뒤죽박죽, 웅성웅성 그리고 질퍽하게 어울렸던 곳이다.
그러니 내가 위의 글들을 좋아할 수밖에.
그래서 더 거짓말 같은 그런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기억 속에서 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