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거리 추억, 그리고 오마니
날씨가 좋다는 이야기는 알아들었다. 다음 문장들은 입술 사이를 제대로 뛰쳐나오지 못한 채 Nancy 할머니의 입 가장자리를 맴돌다 가게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난 아는 척을 해야 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문장들 사이에서 힘을 내어 일어나 내 귀에 다다른 두 단어 ‘gift’와 ‘lost’로 유추해서 만든 응답은 ‘so, did you find?’란 유치원 아이들 수준의 어정쩡한 대꾸였다.
그런 뭉개진 독백과 유치원생의 대답이 오가는 시간대는 대체로 손님이 별로 없는 10시에서 11시쯤이다. 가끔 Nancy 할머니가 있는 동안 들어오는 손님은 그 중얼거리는 독백 혹은 푸념을 나에게 주문과 결재하는 바쁜 사이에 듣지만 잘도 알아듣는다.
역시 그 둘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가? 난 못 알아듣는 그 중얼거림을 다른 손님들은 대충 듣고도 잘도 응답한다. 손님의 응대하는 영어는 중얼대는 것이 아니기에 해석이 가능해졌다. Nancy 할머니와 같이 늙어간다는 고양이 걱정을 하는 중이었다.
하긴 여기 손님들 대화의 절반 이상이 기르는 개 아니면 고양이에 대한 얘기니 이젠 반려동물 얘기가 나오면 그려려니 한다.
‘Gift’는 다시 중얼거림 속으로 파묻혔다. 이젠 옆집 남자도 나오고 조금 후엔 딸도 나오고, 이러다간 저 중얼거림 안에서 할머니가 아는 사람들이 다 나올 기세다. 손님이 계속 없으면 난 저 중얼거림을 계속 듣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단할 수가 없었다. 웅얼거림을 두껍게 둘러싼 외로움이 졸졸 흐르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Nancy는 두꺼운 외로움을 나와 얘기하면서 조금씩 흘리는 중이다. 비록 5분 혹은 10분 이내의 짧은 시간이고 무슨 뜻인지 잘 알아먹지 못하는 동양인이지만 매일 찾아와서 머핀 하나와 사탕 봉지 하나 사는 또 하나의 이유로 보인다.
담배 혹은 음료수 주문이 많거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은 솔직히 짜증이 날 때도 있다. 그런 날은 대충 대답을 하지만 할머니는 그 대충에도 만족하곤 했다. 줄줄 새는 게 깨작깨작 새는 것으로 바뀌겠지만 말하는 그 순간부터 조금씩이나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내 얼굴을 보면서 얘기한 적은 없다. 문 옆에 있는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을 쳐다보면서 얘기한다. 눈에 고인 추억들이 흔들리며 흐르는 걸 느낀 건 그 중얼거림에 딸의 이름이 나온 후였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마치 지구 반대편, 아프리카의 어느 이름 없는 도시 이름을 말하듯 퀘벡이라고 얘기했다. 10년 좀 넘었다고 했다. 다시 그 중얼거림이 시작되었지만 10 years는 분명히 들렸다.
이민 17년이 조금 넘은 나와 딸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Nancy, 50대 후반의 동양인과 70을 바라보는 노랑머리 할머니의 짧고 묘한 동거. 더 깊어진 중얼거림 속에서 흐르는 향수(鄕愁)(여기선 鄕水가 어울릴 수도). 조금 더 물어보면 그리움이 마구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바닥에 떨어진 향수(鄕愁)들은 서로가 서로를 껴안으면서 재잘대며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엊그제 떨어진 향수 한 묶음이 오늘 흘린 몇 조각과 만나 조잘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얼른 날씨로 화제를 바꿨다. 퀘벡은 캘거리보다 더 춥다면서요? Nancy는 비로소 얼굴을 돌려 대답한다. ‘Maybe… but I feel cold.’
화제를 바꾸느라 한 질문의 방향이 뭔가 잘못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춥다니...
아, 이 할머니 왜 춥다고해서 내 서늘한 가슴을 깨우냐고요!
결국 Nancy할머니 얼굴 위로 오마니가 살짝 겹쳐서 들어온다.
추우면 온돌 침대에 누우셔서 꼼짝 못하고 계시는 추위 많이 타시는 울 엄마.
서울이 캘거리보다 더 추울까?
외로우면 더 춥겠죠, 엄마.
외로우면……
*내가 운영했던 캘거리 편의점도 위 사진과 비슷하게 생겨서 가져왔다.
*위 글도 꽤 오래동안 미완으로 가지고 있다가 부족하지만 마지막 수정을 가해서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