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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애옹 생각

네? 첫사랑이요?

나의 첫사랑 후보들

by 송애옹

첫사랑은 정식으로 처음 교제한 사람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처음으로 할 것 다 해본(?) 사람을 뜻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으로 이 사람 때문에 울고 가슴 아프고 힘들게 사랑했던 사람을 뜻하는 걸까.


구글에 첫사랑의 정의를 입력해 봤다. 가장 상위에 뜨는 정보는 나무위키에서 정의한 문장이었다.


'첫사랑은 처음으로 온 마음과 진심을 다해 사랑해 본 사람을 뜻한다.'


...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온 마음과 진심을 다한다는 게 대체 어느 정도인 거냐고)



내 첫사랑은 누구지?

과거에 만났던 남자들 중 첫사랑 후보들을 떠올려봤다.



첫 번째로 '정식으로' 교제했던 사람은 고등학생 때 만났던 P다.

나보다 한 살 위였던 그는 같은 학교 선배였다. 아마도 둘 중 누군가가 "사귈래?"라고 먼저 말해서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누가 먼저 말했을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고등학생들의 연애도 꽤 진지하고 흥미롭던데 나의 연애는 왜 그렇게 지루했을까. 설레는 마음은 사귀기 전 썸 탈 때나 있었던 것 같다. 정작 교제를 시작하고 보니 이도 저도 아닌 맹숭맹숭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사귄다고 주변에 알렸으니 어린 마음에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연애를 하고 싶었던 걸까.


P와는 둘 다 학생이다 보니 대부분 교복을 입은 상태에서 만났었다. 사복을 입은 P를 볼 일이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가 되니 사복을 입고 학교 밖에서 보는 일이 늘어났는데,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난감함을 느꼈다. P는 함께 영화를 보러 가거나, 나들이를 가는 등 학교 밖에서 만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왔다. 밖에서 자주 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같은 티셔츠나 청바지가 아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자, 티셔츠, 바지, 신발 모두 마치 '데이트 룩'이라는 이름의 하나의 세트를 정해 유니폼처럼 입고 나오는 느낌이랄까. 몇 번의 데이트에 매번 똑같은 세트를 장착하고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보며 내 마음은 조금씩 차갑게 식어갔던 것 같다.


사귄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P의 집을 놀러 갈 일이 생겼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외출을 하셔서 집이 빈다고, 맛있는 것을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식탁에 이것저것 음식들을 차리며 쑥스러운 듯 웃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그저 그의 허연 맨발만 보였다. 본인의 집이니 그냥 편하게 있었던 것뿐이었을 텐데. 그의 발등 위에 듬성듬성 난 털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 우리의 연애는 끝났구나. 하다못해 맨발에 털까지 꼴 보기 싫어지다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학창 시절 처음으로 '정식으로' 교제했던 P와의 연애는 100일도 못 가서 끝났다. 오로지 사귀기 전 잠깐의 설레는 감정만 있고 사랑은 없었던 고등학생의 철없는 연애였다.

처음 정식으로 교제한 사람을 첫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초기의 설렘만 있고 그 외의 감정은 없었던 P는 과연 첫사랑인 걸까?



이번에는 대학생 때 만났던 K다.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 무리 중 한 명이었던 K는 대부분의 수업이나 과제를 같이 하는 사이였다. 여러 명의 인원이 함께 준비해서 발표하는 수업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만나게 됐다.


K는 감성이 풍부한 아이였다. 크게 깔깔거리며 웃는 일도,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일도 많았다. 행동도 크고 거침없었고 아이처럼 응석도, 애교도 자주 부렸다. 키는 나보다 훨씬 컸지만 그런 행동들에서 나오는 귀여움이 매력적이던 아이였다. 반대로 그렇다 보니 듬직한 느낌은 크게 받지 못했던 것 같다.


1년 내내 붙어다니다가 2학년이 되어 K는 군대를 갔다. 제대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와 함께 보냈기 때문에 혼자 있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나는 그렇게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하지만 K가 군대를 간 뒤로 갑자기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되다 보니 결국 내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서 꽤 착했던 K와의 연애도 끝이 났다.


K와는 처음으로 연애다운 연애를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화나게 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고 K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슬퍼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상대이니 K는 내 첫사랑인 걸까?



만약 가장 나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만들었던 사람이 첫사랑이라면?

나를 몇 년 사이에 두 번이나 먼저 좋다고 고백해놓고 남보다도 못하게 굴어 결국 내 입에서 헤어지자 소리를 하게 만든 S? 앞서 한 연애의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은 상태로 다급하게 만나 가장 기이하고 비정상적인 연애 후 3주 만에 이별을 통보당한(하지만 후유증은 몇 달간 이어졌던) L?

그들은 모두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고 아프게 했으며 울게 만들었다. 그러면 가장 고통스럽게 사랑한 이들이 첫사랑인가?



나에게 과연 첫사랑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과거의 남자들을 하나 둘 떠올리다 보니 결국 이것만큼 부질없는 짓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이라는 단어 하나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본인이 만나고 있는 상대의 첫사랑은 누굴까 궁금해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 사전적인 의미로 정말 건강하게 사랑을 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연민이나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결국은 과거를 지나 지금, 현재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의 모습이 내가 내 방식으로 정의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아주 건강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스스로 믿는 감정을 사랑이라 여길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내가 선택해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내 첫사랑이라는 것.

...그럴싸하지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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