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트를 갖고 있다. 그 노트가 어떤 경로로 내 손에 들어오게 됐는지, 어떤 색상과 형태를 가진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어느 순간, 그 노트는 내 것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노트를 갖게 됨으로써 어떠한 '능력'도 함께 갖게 되었다. 노트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그는 실제 현실에서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일본 만화로 알려져 있는 '데스노트'와 비슷하다.
나는 어쩐지 그 노트에 친한 지인인 P의 이름을 썼다. 왜 하필 P였을까? 나는 P를 좋아하는데.
정말 노트에 이름을 쓰는 행위만으로 사람이 죽을까? 이런 것 따위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해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그의 이름 석자를 적는다.
다음날 정말 P가 죽어버렸다.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함께 집에 거주하고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P가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내가 노트에 P의 이름을 써서 그가 죽은 것이지만 내가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P가 죽었다는 사실에 몹시 마음 아파하면서 동시에 생각한다. '내가 죽인 것을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이제 P는 세상에 없다. 정말 없다. 내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그 사실은 나만 알고 있다. 슬프지만 불안하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른다. 나는 온전히 슬퍼할 수도 없다. 내가 죽인 것을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마음 때문이다. 결국 두려운 마음이 슬픔을 이겨버렸다. 그 마음을 인식하자마자 생각한다. '나는 구제불능 쓰레기에 소시오패스인가.'
며칠이 지난 듯하다. P는 여전히 죽은 상태다. 그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면서 동시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시간이 흘러 나는 내가 가지게 된 '능력'을 의심한다. 정말 P가 나 때문에 죽은 게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이의 이름을 쓴다. 그는 친한 지인은 아니지만 누구나 얼굴을 알만한 유명인이다. 그를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노트에 K의 이름인 두 글자를 쓴다. 그의 이름은 외자였다.
다음날 아침, 유명인 K의 죽음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사인은 미상이다. 사람들은 K의 죽음에 대해 자살이라는 둥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둥 떠들어댄다. 나는 뉴스를 보며 묘한 기분을 느낀다. 이번에도 내가 그의 이름을 노트에 써서 죽였지만 그 사실은 역시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만 입을 다물고 있는다면.
나는 P의 죽음을 슬퍼하며 동시에 내가 그를 죽게 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K도 내가 죽였다. 그와 나는 일면식도 없는 남이다. K의 가족이나 지인들은 내가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P를 죽일 때보다 스스로가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낀다. 나는 조금 더 안도한다.
AM. 05:45
이리저리 뒤척이다 눈을 뜨니 내 방이다. P와 K의 죽음은 모두 꿈이었다.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꿈속에서 내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들킬까 노심초사하던 마음이 떠오른다. 의도하지 않은 범행 뒤에 침묵하던 얼굴들이 스쳐간다. 내가 꿈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조용히 이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