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였다. 정확한 나이는 잘 모르겠다.
나와 언니는 서울 땅에서 각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같이 살아볼까?' 생각하고 보증금을 끌어모았다.
천만 원.
그게 우리가 월세 보증금으로 사용 가능한 전재산이었다.
지금은 더하겠지만 그때도 서울에서 보증금 천만 원으로 투룸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닥다닥 집이 붙어있는 동네로 가거나 경기도 외곽으로 나가면 조금은 저렴해지겠지만 그러긴 싫었던 것 같다. 어째서였는지 특정 동네를 딱 정하고 무작정 부동산을 찾아가 보증금 액수에 맞는 투룸을 보여달라고 했다.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몇 군데의 집을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마지막 집을 가게 되었다.
B01호. 골목 한쪽에 위치한 빌라의 반지하 집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일단 평수가 다른 집들에 비해 넓은 편이었고 건물 입구도 구석지지 않고 트여있었다. 창고 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일러 실도 따로 있어서 공간을 꽤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반지하라는 점이 걸렸지만 그동안 돌아다니며 봤던 집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기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둘러보던 중 보일러실 창문의 방범창이 두줄이나 끊어져 있는 것을 봤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끊은 것이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집주인 할아버지에게 끊어져 있는 방범창은 수리해 주시는 거냐고 여쭤봤더니 저 정도는 괜찮다고 하셨다. (사는 건 우린데 할아버지가 왜 괜찮...?) 이후에 방범창을 고쳐서 살았는지 그대로 살았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어쨌든 그렇게 언니와 나 둘이서 함께 살게 되었다.
B01호에서 처음 맞는 여름.
지구 온난화가 갈수록 심해져 한여름엔 40도 가까이 육박하는 요 몇 년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때도 꽤 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어컨이 없었던 우리는 아주 조금이지만 겁도 없이 창문을 열고 잤다. 건물 앞이 트여있는 구조여서 범죄에 대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창문에 방범창도 있고 누군가가 그것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는 한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남자 1호.
여름밤. 새벽 1시쯤이었던가. 내 방에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언니가 있는 옆방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달려가보니 창문이 조금 열려있었고 언니는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내 기억에 그 당시 언니는 늘 방에 불을 켠 상태로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거나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에 드는 일이 많았다. 그날은 더워서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누워있다가 잠들었었나 보다. 그러다 인기척이 나서 깨보니 어떤 남자의 팔이 절반 이상이나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고 했다. 언니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그대로 창문을 닫아버렸고 남자는 놀라 창문에 끼인 팔을 빼고 도망을 갔다고 했다.
좀... 기괴하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 남자는 대체 팔을 넣어서 뭘 하려고 했을까? 창문과 거리가 멀어 언니에게 닿을 거리도 아니었고 훔쳐보는 게 목적이었다면 창문만 열고 봐도 됐을 것을.
남자 1호 사건을 계기로 창문은 낮에만 열고 밤에는 무조건 닫고 자는 생활을 하게 됐다. 하지만 동네 남자들에게 여자 둘이 사는 게 소문이 다 났는지(?) 그들은 꾸준하게도 우리 집을 찾았다.
남자 2호.
또 밤. 방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방 창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요."
이 상황이 정상적이진 않아서 (이 밤중에? 창문을? 왜???) 언니 방으로 가서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린다고 알린 뒤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데 또 밖에서 똑똑 두드렸다. 무섭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좀 화가 나서 면상 좀 보자 싶어 창문을 열었더니 젊은 남자가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은 채 창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당신은 뭐냐, 남의 집 창문은 왜 두드리냐 물었다.
"불 좀 빌려주세요."
그리고 담배를 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건 또 웬 미친놈인가.
무슨 배짱이었는지 순간적으로 화가 난 나는 주방에 있는 과도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걸로 뭘 어쩌려고? 남자를 위협이라도 하려고...?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그땐 그랬다. 뭐, 20대의 패기 같은 것이려나. 나중에 당시의 상황을 남자친구에게 말했더니 엄청 위험한 행동이라고 한 소리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남자는 건물 뒤쪽의 공간에 숨어있다가 내가 안 들어가고 기다리니 비죽비죽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를 향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는 "신고하세요~" 하고 슬리퍼를 끌고 가버렸다. 신고하라며, 왜 도망가는 건데.
그의 연령대는 2~30대 정도로 보이는 너무나 '멀쩡하게' 생긴 남자였고 얼굴도 확실히 봐두었기 때문에 한동안 동네를 걷다가 젊은 남자라도 보이면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고는 했지만 이후 그 남자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우리 집 화장실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평소 환기를 위해 화장실 창문을 열어두고 지내다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닫고 사용하곤 했다. 방 창문은 비교적 트인 공간에 있었지만 화장실 창문이 있는 위치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건물 뒤쪽이었다.
남자 3호.
역시나 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씻을 준비를 하고 욕실에 들어갔다. 창문을 잠그고 물을 틀자마자 누군가가 창문을 열려고 했다. 창문은 안쪽에서 잠근 상태였으므로 창문 열기를 시도하는 남자의 손 실루엣만 계속해서 보였다. 큰 소리로 욕을 해주었더니 도망갔다.
우리 집은 반지하였으므로 바깥에서 창문을 열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할 것이었다. 누군지 얼굴조차 모르는 남자 3호는 내 얼굴을 알고, 내가 집에 들어가는 것도 알고, 그 시간에 맞춰서 화장실 불이 켜지자마자 꾸역꾸역 허리를 숙여가며 창문 열기를 시도했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자 지긋지긋해졌다. 작은 소리에도 엄청나게 예민해졌고 언니와 웃으며 떠들다가도 방충망이나 바깥쪽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또 누가 창문을 열려고 시도하는구나.' 생각하며 숨을 죽이는 날이 많아졌다. 환기를 위해 낮에는 창문을 열었다가 해가 지면 닫는 일이 많아 창문을 안쪽만 잠가둘 때도 있었는데 어떻게 알고는 그렇게도 열려고 애를 쓰는지.
경찰에 신고도 참 많이 했다.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경찰서가 있었는데 신고를 하면 그들은 늘 최소 20분은 지나야 왔다. 창문에 부착 후 창문이 열리면 소리가 나는 방범벨 같은 것들을 나눠주시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집 근처를 몇 번 순찰 후 그냥 돌아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잡지 않는 한 경찰을 부른 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싶다. 어쨌든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고 나자 창문은 아예 모두 걸어 잠그고 여름에도 열지 않고 지내게 됐다.
내 평생 반지하에서의 생활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그 사이 다양한 인간들을 참 많이도 만났다. B01호에 여자 둘이 산다는 사실을 그 동네 남자들은 다 알고 있었는지, 안다면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다고들 하던데, 아니었나?
그렇게 지낸 것도 몇 년.
이후 언니는 따로 독립해서 나갔고 언니가 살던 방에는 대신 남동생이 들어와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남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한 후로는 우리 집 창문을 두드리는 인간도, 화장실 창문을 열려는 인간도, 매일 밤마다 잠겨있는 창문 열기를 시도하는 인간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참 알 수 없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