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흔적 85
9월 8일, 태풍은 이미 끝나고 햇빛이 쨍. 나는 왜 너를 늘 이해하고 있었을까
호는 대학시절부터 친한 남사친이었다. 군대를 가고 휴가를 나오면서 호와 친한 동기 륜까지 자주 같이 모이다 보니 우리 셋은 어느새 서로의 친구가 됐다. 남은 한 명까지 군대를 가고 서로 휴가를 맞추면서 우리 셋은 꾸준히 만났다. 친구들이 전역을 하고 나서는 셋이 여행도 종종 다녔다. 서로를 이성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기에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때론 이성으로서 고민을 들어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갔다.
고 생각했다. 9년이라는 시간을 봐왔고 서로 상황은 많이 달라지고 같은 과를 나와 걸어가는 길이 너무도 다르지만 우린 그래도 친구였다. 하지만 9년의 시간 속에 유독 호와 많이도 싸웠고 서운했고 참아왔다. 호는 우리와 번갈아가며 어색한 사이가 되고 다시 친구가 되길 반복했다. 때론 서운한 입장이 되고 때론 중재자가 되는 과정은 조금은 지치는 일이었다.
호는 늘 '본인이 할 일이 없는 시간대가 생기면' 우리와 약속을 잡는다. 혹은 선약이 있음에도 이 선약이 확정이 아니면 깨질 것을 대비해 우리에게 만남을 제안한다. 처음엔 휴일이 일주일에 단 한 번인 친구이기에 이해하려고 했고, 이직 후엔 습관처럼 당연시 여기는 태도를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호는 우리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마음 깊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을 피하기 위한 사과, 알겠어 안 그럴게라는 무성의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호는 늘 우리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우리가 친구로서 호에게 마음 쓰는 것은 '친하니까 당연'한 것이었고, 다른 친구들이 마음 쓰는 것은 '표현 못할 만큼의 고마움, 친구라는 이름으로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다니!'였다.
우리 앞에서 그 친구들의 마음에 감동했다는 열변을 토해내고 자랑하듯 얘기할 때마다 '우리는?'이라고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모든 것이 쌓였다. 나에게 걱정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함부로 내뱉던 말들, 호의를 당연시 여기던 행동, 나를 그저 비는 시간대에 만나는 대비책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이 이젠 정말로 힘들어졌다.
이젠 내가 손을 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내가 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오로지 내 의지였다. 누가 강요한 것도 책임감이 있던 것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20대, 내 청춘을 같이 보낸 친구니까, 내가 좋아하는 친구니까 기꺼이 이해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이젠 서로 더 이상 감정이 다치지 않게 인연을 끊을 때인 것 같다.
호가 작은 계기를 주었다. 선약이 있음에도 내 약속을 끼웠고 결국 그 선약이 제대로 이루어지면서 내 약속은 깨졌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호구처럼 참고 넘기고 그러지 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을 이제 끝내야 함을 알았다. 호에게는 자세한 얘기를 남기지 않았다. 9년의 세월 속에 충분히 무수한 내 마음을 전했었다. 이젠 전할 의지도 힘도 남아있지 않다.
"이미 약속이 있었는데 또 나랑 약속을 잡았구나,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이 말했던 것 같은데...
우리가 다시 약속을 잡고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잘 지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