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흔적 120
12월 2일, 수능 한파 전날이라 서늘.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럽다는 건 칭찬이 아니다.
수능 한파 전날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날이 춥다. 서늘한 공기 때문인지 사무실에서도 몇 번이나 손을 맞잡고 괜히 입김도 불었다. 고객사 인터뷰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내일이면 수능을 보러 갈 꼬부기가 신경이 쓰였다. 괜한 부담을 주기 싫어 맛있는 거 먹자는 말만 줄줄 늘어놨다. 그러다 문득 내일 점심 도시락이 신경 쓰였다. 딱히 싸줄 사람도 없고 그런 걸 신경 써줄 분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나'는 늘 그렇듯 '역시나'가 된다. 괜찮다는 꼬부기 말도 이젠 믿기지 않는다. 안 괜찮은 얼굴로 씩씩한 척 웃고 있을 얼굴이 떠올라 괜히 가슴이 답답했다. 회사만 아니면 얼른 도시락을 준비해서 아침에 챙겨주고 싶은데, 나도 회사라는 구차한 변명을 핑계 삼았다. 어차피 입맛도 없을 거고 짧은 시간이라 간단한 빵을 사 가면 된다고 오히려 나를 다독이는 꼬부기.
종종 꼬부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어른스러운 아이' '철이 빨리 들어 착한 아이'라는 말이 싫다. 아이는 아이다운 게 좋다고 생각한다. 아직 여리고 어린 나이의 아이가 '어른스러워진다'는 건 그만큼 단단해져야 할 어떤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어른스럽게'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철이 빨리 들어' 눈치 있게 행동해야 하는 아이라니, 나는 그런 아이를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어른들은 항상 그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걸 해보라며 도전하라고 아이들 등을 떠밀면서 왜 철은 빨리 들고 어른스러워지길 바라는 걸까. 나이에 맞게 행동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아직 누군가의 보호라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스스로를 성장시킬 때니까. '어른스럽게 부모를 잘 이해하고 착하게 행동하는'이라는 이름표가 때론 너무 무거워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걸 알까.
나 역시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부모에게 바라는 것을 최대한 포기하려고 했고 기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부모님은 그 점을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딸은 어른스러워서 다 이해해줘' '철이 빨리 들어서 착해, 이렇게 해도 괜찮아, 알아서 잘해'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상처였는지 부모님은 모를 테지. 사람들 앞에서 짜증내고 화낼 수 없어 웃는 딸의 진짜 속마음을 아마 지금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부모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선택권 없이 주어진 상황은 억지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가끔은 버거워서 그들에게 떼를 쓰고, 싫다고 빽빽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싶었다. 그럴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어른스러워졌고 철이 들었다.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내 길 위에서 꿋꿋하게 걸어가려면 그렇게 해야 했다. 내 마음대로 굴고 기대기엔 때론 그분들도 삶이 버거워 보였다.
지금은 많은 시간이 지나 나 역시 그런 것에 초연하고 담담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내 어린 시절이 투영되는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갈비뼈 깊숙이 심장 제일 안쪽에 숨겨놓은 상처투성이 어린아이가 단단한 막을 비집고 나와서 그 아이들에게 달렸다. 나 또한 그랬듯 그 아이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였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살지 않길 바랬다.
사실 내가 그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놓인 상황이나 현실을 바꿔줄 수 없으니 그저 말을 들어주고 때론 안아주고, 그 나이에 맞게 굴 수 있도록 나라도 아이 취급을 해주는 것. 본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응원하는 것, 지금 상황이 당연하지 않다고 몇 번이고 알려주는 것.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슬퍼하지 않게 작은 그늘이라도 만들어주는 것.
그때의 내가 받고 싶었던 별거아닌 위로나 응원을 그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것.
지친 발걸음에 언제든 뒤돌고 싶을 때면 그 뒤를 밝히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