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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Mar 20. 2019

마음 깊이 새겨진 그 시절 추억의 맛

일상의 흔적 36

3월 17일, 오랜만에 꺼낸 봄 옷. 그리운 맛을 찾았다.

이 가게를 찾은 것은 우연 중 우연이었다. 카페를 찾아 나선 길에 겉모습이 너무 예뻐 충동적으로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카페 같은 외관과는 다르게 이곳은 마니아를 위한 막걸리를 파는 곳이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나와 지인이지만 분위기와 신기한 막걸리 이름에 홀려 직원의 추천을 받아 주문까지 마쳤다.


이름도 생소한 '호랑이 배꼽'과 메밀전병을 기다리며 기대에 가득했다. 생소한 우리를 위해 직원이 막걸리를 살짝 섞어주며 설명을 해줬다. 흔히 마셨던 묵직하고 시큼하던 맛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산뜻한 맛이 느껴져 한잔을 그대로 다 마셨다. 적절한 소음과 담백한 분위기, 상큼한 막걸리까지 우린 주말의 마지막 날을 완벽하게 즐겼다.


두 잔째 마셔갈 때쯤 메밀전병이 나왔다. 접시를 내려놓자 반가운 형태의 익숙하고 그리운 향이 났다. 옛날에 할머니가 가끔 만들어주셨던 메밀전병과 비슷해 순간 접시를 한참이나 붙잡고 있었다. 크게 한입을 물고 나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깊은 내면에 잠든 기억을 깨우는 그 시절 추억의 냄새와 맛이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내 모든 것을 챙겨주던 나이 많은 엄마였다. 입이 짧은 내가 혹시라도 더 먹을까 싶어 끼니때마다 새로운 반찬 하나씩은 꼭 만들어줬고, 덕분에 하루에 한 번은 집 앞 시장을 같이 나갔다.  천천히 시장을 둘러보며 나물 한 가지를 사더라도 꼭 할머니들이 파는 곳에서만 샀었다.


꼬물꼬물 수줍어도 인사를 건네면 예뻐해 주시는 할머니들의 손이 좋아 나도 즐겁게 시장을 따라나섰다. 정확한 이름은 잘 몰라도 이맘때면 어떤 나물이 맛있는지, 어떤 물고기가 나올 때쯤인지를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내 손으로 골라 그때그때 만든 신선한 반찬은 내 어린 시절 최고의 맛으로 남아있다. 아무리 같은 레시피로 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그때의 그 맛을 흉내 낼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음식은 늘 약간은 싱겁고 담백한 편이다. 혈압을 조심해야 하는 본인의 건강 때문도 있지만 어린 나를 배려했었다. 그런 할머니의 음식 중에 가장 맵고 짠 음식은 메밀전병이다. 원래 심심한 무나물이 들어가는 일반 전병과는 다르게 할머니표 메밀전병은 매콤한 김치가 특징이다. 늘 건강을 조심하는 할머니도 메밀전병을 만들 때면 과감하게 양념과 고추를 넣곤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무리 똑같이 만드려고 해도 늘 실패했었다. 엄마도 할머니가 그리울 땐 말없이 할머니표 요리를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날의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어온 이곳에서 할머니의 맛을 느끼다니, 이렇게 반가운 행운은 늘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배부름도 잊은 채 한입한입 소중하게 메밀전병 접시를 비웠다.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꿈에도 잘 나와주시지 않는 할머니가 야속했지만 오늘처럼 우연히 할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인연이 생겨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쯤 한번 꿈에 좀 나와주었으면, 한 번만 더 그때 그날처럼 같이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 조금 더 자주 오고 사장님과 친해진다면 메밀전병의 레시피를 꼭 물어보고 싶다. 꾸준히 와서 같은 메뉴를 시키면 알려주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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