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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Aug 09. 2019

노을처럼 늙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상의 흔적 75

8월 3일, 뜨거운 제주도 날씨에도 즐거움. 노을처럼 늙고 싶다는 마음이란

오로지 엄마와 나 둘만의 데이트를 약속한 날이다. 제주도에 내려온 뒤 이리저리 쌓이는 약속 탓에 둘만의 시간을 거의 보내지 못했다. 제주도에 살면서도 멀리 가기 싫어하는 엄마를 달래고 달래 애월부터 종달리까지 맛집과 예쁜 카페 투어를 하기로 했다. (사실 난 성산을 가고 싶었지만 경악하는 엄마의 얼굴에 다음 기회로 밀었다. 내가 운전대를 얼른 잡을 수 있기를 빌면서.)


전날까지도 툴툴거리던 엄마는 당일이 되자 설레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나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부스럭 소리를 내며 (실수인 것처럼) 나를 깨웠다. 결국 비몽사몽 눈을 뜬 나를 보는 엄마의 얼굴에 푸스스 웃어버렸다. 가족 소풍을 기대하던 어린날의 내 얼굴이 보였다. 투닥투닥거리며 준비를 마치고 햇빛이 내리꽂는 밖을 나섰다.


오랜만에 함께하는 엄마와 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엄만 늘 가던 길도 괜히 화창하니 좋다고 했고 난 늘 보던 바다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했다. 오늘만큼은 관광객이 되어 가는 길 곳곳 예쁜 곳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삐질삐질 땀이 흐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서로 인생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한껏 몸을 낮췄다.


그렇게 사진도 찍고 커피도 마시고 가보고 싶다던 카페 외관도 보고, 여름날의 긴 낮도 끝나가고 있었다. 노을이 걸린 하늘에 어느새 바다까지 물들었다. 돌아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노을을 바라봤다. 차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조용히 바다를 보던 엄마가 덤덤히 말을 건넸다.


"저렇게 노을처럼 늙고 싶다."

"노을처럼 늙는 건 어떤 건데?"


"글쎄... 그냥 저렇게 문득 바라보면 좋은 노을처럼. 사실 노을은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잖아. 그런데 우연히 이렇게 만나면 반갑고 기분 좋고 때로는 일부러 노을을 찾아 울컥 내 감정이 흘려보내기도 하고 많은 생각도 나고 때로는 노을에 기대서 위로도 받고. 엄만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언제든 만나는 긴 낮과 긴 밤보다 찰나의 순간에 찾아와서 소중하고 우연처럼 만나서 반가운 거."


엄마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것을 내줘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긴 낮에 사람들의 빛나는 웃음을 양보하고 긴 밤에 사람들의 평안을 양보하고 노을은 찰나의 순간에 사람들과 얼굴을 맞댄다. 엄마는 그런 노을처럼 늙고 싶다고 말했다. 신경 써서 노을을 찾는 사람의 가슴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론 우연히 만나 반가워하는 사람의 손을 토닥여주는 노을 같은 사람.


엄마는 늙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이 엄마를 찾던 크게 품어주고 등을 토닥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찰나의 순간이어도 엄마를 떠올리고 엄마를 찾아준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따뜻함이 되기를, 잠시 고민을 내려둘 수 있는 쉼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올해 환갑을 맞은 엄마는 유독 생각이 많아지는 날들이 길어진다고 했다. 본인의 삶을 다시 돌아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더 깊게 바라보기도 하며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고민도 깊어진다고 했다. 지긋이 엄마를 바라보는 나에게 엄만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노을이 예쁘잖아. 엄만 예쁘게 늙고 싶다. 사람들 기억 속에 예쁜 사람이고 싶어.

어휴 나이가 들어도 예쁘고 싶다~ㅎㅎ"


아직도 소녀같은 우리 엄마. 엄마가 긴 낮이어도 긴 밤이어도 찰나의 노을이어도 어렴풋한 새벽이어도 어떤 모습이든 엄마가 원하는 모습으로 남아주기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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