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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편했을까

소의 가죽, 부처의 얼굴, 그리고 나

by 빛나거나 미치거나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을 누군가에게 꼭 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질문하고 사유할 수 있었지만, 그 장면을 소비하길 권하고 싶지는 않다. 이건 위선일까, 아니면 솔직함일까. 혼란스럽다.

장 환,<소가죽 부처 얼굴>이다.




기묘한 불상의 얼굴

첫인상은 강렬한 시각적 충격이었다. 벽면에 걸린 소의 가죽, 털도 발굽도 꼬리도 남아있는 소의 가죽, 그리고 그 한가운데 털로 뒤덮인 온화한 부처님의 얼굴이 있었다. 낯설고 불쾌했다. 마치 어떤 금기를 마주한 것 같았다. 내가 이제껏 보아온 불상의 모습은 하나같이 고요하고 평온했다. 빛을 반사하는 매끄러운 표면에서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까지도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은 묘했다. 불살생을 가르치는 신성한 상징이 죽은 동물의 신체 위에 겹쳐졌다. 윤기 없는 갈색 털로 뒤덮인 온화한 얼굴은 기묘했다.


불편함과 마주하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라 비틀어진 듯 아래로 길게 늘어진 꼬리, 그리고 발굽도 보였다. 잔인하다. 분노의 감정. 그리고 뒤이어 죄책감, 슬픔, 기분 나쁜 감정들이 뒤섞여 올라왔다. 의아했다. "나는 소고기를 먹는 사람인데, 왜 이게 불편하지?" 불상은 성스럽게 대하고 가축은 당연하게 식재료로 대하는 나. 식재료로 소비하면서 죽은 가축이 전시된 걸 보고 분노를 느끼는 나. 존중받지 못한 죽음에 분노하면서도 그것을 소비하는 행위에 동참하는 나. 이것들이 동시에 떠오르며 충돌했다. 모순적인 스스로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었다.


침묵하는 관람자

생각해보면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정치의 언어이기도 하고, 종교의 틀이기도 하며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나는 그 장면을 소비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침묵하는 관람자. 그 사실이 불편했다.


짧은 글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여러 생각과 감정이 지나갔다. 분명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여전히 나는 불편하고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살아가며 이 장면을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이것은 결국 내 안에 있고, 내가 살아가는 삶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작품 정보]

장환, <소가죽 부처 얼굴>, 2007, 298×200㎝


[전시 정보]

모든것은 변한다 - 뮤지엄SAN 소장품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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