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오늘 설마 돼지?
그날 백과 나는 차돌박이 3인분과 된장을 시켰고, 술 없이 식사를 했다. 남은 차돌박이가 다 떨어져 갈 때쯤 우리는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여기까지만 먹자’
‘응 그러자!’
딱 적당히 배부른 상태였다. 식사 후 아메리카노를 들고 산책을 좀 하다가 자면 ‘아 오늘은 돼무룩(돼지+시무룩) 하지 않았어’ 하며 흐뭇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소화기관이 약한 나는 노파심에 가스활명수를 먹겠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불쑥 백이 굴짬뽕 컵라면을 들고 왔다.
“내가 계산할 게”
말릴 틈도 없이 나의 가스활명수와 굴짬뽕면 계산을 마친 백은 성큼성큼 뒤편으로 가더니, 성난 황소마냥 컵라면을 거칠게 뜯었다. 그리곤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제조에 집중했다. 그의 삼백안 눈동자에 사뭇 진지함이 비췄다. 하얀 굴짬뽕 수프를 완벽한 스냅으로 면에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이 튀지않게 쪼로록 부었다.
우리는 분명 암묵적 눈빛을 주고받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기 까지 했다. 그런데 ‘그만 먹자’ 라고 말하는 줄 알았던 그의 눈빛이 ‘2차하러 가자’ 였다니. 나의 동공은 당황했고, 목은 떠듬떠듬 할 말을 찾느라 바빴다.
너 오늘 돼지니?
여자한테 오늘 그날이냐고 물어보는 게 실례이듯이, 돼지에게 오늘 돼지냐 묻는 것은 실례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오늘 백은 돼지구나’ 하는 결론을 내린 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 번, 돼지의 마음은 돼지가 안다. 돼지의 날을 축복해주자.
이 번, 먹는 거를 조절해주는 게 참사랑이다. 백을 회유해보자.
“라면이 먹고 싶었구나?”
“아까 좀 느끼하긴 했어.. 굴짬뽕같이 시원한 국물이 땡겼구나”
나는 축복해주기로 했다. 라면을 뜯고 있는 그의 등 뒤에서 그를 지켜봤다. 이미 뜯었는데 버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백은 내 말에 대답도 없었다.
내 앞에는 말을 못 들을 정도로 식욕이 폭발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백이 현재 굴짬뽕에 집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두 번째 방법으로 회유해보기로 했다.
“잇다가 야식 먹게 조금만 먹는 게 어때?”
“야식 배는 조금 남겨두자~”
“백아...?내말들리니?”
그 사이에 백은 묵묵히 라면 세팅을 완료했다. 이젠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백이 어쩌다 이렇게 돼지가 되었지... 원래 나만 돼지였는데...’ 나는 슬펐다. 다 내 탓인 거 같았다.
잘 처먹네... 나는 백의 섭취를 ‘처먹는다’고 말하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편의점 한쪽에 서서 허겁지겁 먹는 그의 모습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백이 적어도 앉아서 먹기만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의자를 찾았다.
“내가 먹을 거 아니야 저 할아버지 줄려고”
“우리 할아버지 생각나서”
창밖을 보니 안주 없이 깡소주를 드시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백은 할아버지께 컵라면을 드렸고 나는 뒤에서 그런 그를 지켜봤다. 무슨 생각 했는지 묻는 백에게 내가 어디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왔는지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