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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뇨 Nov 23. 2021

사수 없는 주니어 기획자가 성장하는 방법

사수 없는 삶

 사회에 나온 이후 첫 회사, 첫 동료, 첫 사수에 따라 사회생활의 시작이 고달파지기도 혹은 견딜 만해지기도 운이 좋다면 성취감과 성장을 얻기도 한다. 특히 가장 옆에서 타의로 묶이는 운명 공동체인 '사수'는 큰 영향을 준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사수 師授 : 스승에게서 학문이나 기술의 가르침을 받음.

 

  이렇게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들은 단어임에도 그 사전적 의미까지 명확하게 알려고 한 적 없다는 것이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저 좋은 사수와 나쁜 사수에 대한 이야기들만 항상 가득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수가 있다는 전제 하에 모든 이야기는 전개되었고 사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아예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끊임없이 머리를 쥐어 짜내는 사유의 고통에 직격타를 맞는 기획자(만약 기획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에게 사수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각각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진 주니어 기획자 두 명이 그 길을 걷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 성장하고자 어떻게 발버둥 치고 있는지 생생하게 전하고자 한다.



올드스쿨 사수와 함께했던 과거

 현재는 브랜드 기획자이자 버벌리스트로 나를 소개하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네이미스트로 소개했었다. 브랜딩 에이전시이지만 브랜드 네이밍 프로젝트의 비중이 더 높았던 첫 회사에서 내게 사수는 조금 독특했다.


 3년 동안 함께했던 디렉터이자 사장님. 한 두 달 기본적인 사항을 알려준 바로 위 대리님이 떠난 후 그 공백을 채울 사람이 없었고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했다. 즉, 디렉터님과 중간 관리자 없이 그냥 바로 같이 일을 했다. 브랜드 네이밍부터 스토리, 슬로건, 태그라인 등 버벌 아이덴티티를 개발하는 방법부터 보고서와 제안서 만드는 것까지 모두 그분께 배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쌩 신입과 업계에서 20년을 넘게 일해온 잔뼈 굵은 디렉터와의 격차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내가 사용한 기술은 눈치와 모방이었다.


 눈치껏 디렉터님이 지금까지 만들었던 장표와 네이밍 아이데이션 자료, 제안서들을 전부 훑었다. 디렉터님 또한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지금까지 해왔던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무언가를 가져오길 바랐다. 그게 네이밍이든 슬로건이든 혹은 보고서 기획이든. 당시에는 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부터 아이데이션과 기획을 시작해야 하는지 깊게 이해하지 못했다. 옛말처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내 아이디어와 접근이 더 젊고 새로우며 매력적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짬이 좀 찼을 무렵 이해하기 시작했다. 디렉터님이 모방의 과정을 통해 배우길 원했던 것은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였다. 아무리 신선하고 매력적이고 좋은 안이어도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후보 안 1에 불과했다. 그 수많은 과거의 보고서와 제안서, 아이데이션 방식은 적어도 누군가를 설득했던 힘이 있었다. 어떤 네이밍, 슬로건, 스토리도 이들을 사용해야 하는 타당한 논리가 앞서지 않는다면 그냥 그건 예쁘고 있어 보일 뿐 흩날리는 텍스트일 뿐임을 배웠다.



사수 없이 동료와 함께하는 현재

 이제 모방을 넘어서 기획이나 아이데이션에 내 관점이나 방식을 드러내고 싶고, 나아가 누군가의 그늘에서 나와 내 목소리를 좀 더 키우고 싶어 졌을 때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로 이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내 관점, 내 의견, 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드러내고 실제로 반영하는 것에 대한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톡톡히 치르기 전까지는. 일을 하면서 미쳐버릴 것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누구도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도 내 옆의 동료도 모두 길을 잃어버릴 때면 사수를 찾아 헤맸다. 사수가 없는 것에 매력을 느껴서 온 주제에 사수를 찾다니!


 그렇게 수많은 야근과 각종 레퍼런스, 열띤 토론과 조언들을 끌어모아 프로젝트를 이끌어왔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나 대신 결과를 책임지는 디렉터와 함께했던 3년보다 더 가파르게 성장했음을 느낀다.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머리를 굴리다 보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정말 사수가 없었나? 레퍼런스로 봤던 보고서들, 책들이 어쩌면 사수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내 옆의 동료도 사실은 내 사수가 아니었을까? 결국 어디서든, 누구든 보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사수가 아닌가.



  

펭수 퇴사 출처:EBS

  21년 1월 초 첫 회사를 그만뒀다. 많이 배웠다는 생각과 더 이상 작업의 서포터로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정말 과감하게 그만뒀다. 사실 계획 없이 퇴사했다기보다는 벌써 그다음 스텝을 결정한 후 퇴사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다만 다음 회사에서 나에게 닥칠 어려움을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한 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도비 상태를 즐겼다.



사수가 있다가 없네..?

  들어가자 말자 바로 킥오프였다. 회사에 갓 들어온 만큼 자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고 싶어서 빛만 보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프로젝트 완료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퇴근하면 예전 회사의 장표들을 보면서 어떤 점이 부족한 지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하는지 공부하며 프로젝트에 미쳐있었다. 미친만큼 시간을 투자한 만큼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고 서포트에서 벗어나 메인으로 첫 프로젝트를 끝낼 수 있었다. 근데 진짜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브랜딩 전략 프로젝트는 회사에 비즈니스 상황, 내부 상황 등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 그 회사만의 브랜드 전략을 짜줘야 하는데 경험도 부족하고 내공도 부족해 큰 프로젝트를 리딩해 끌고 나가기 너무 벅찼다.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일은 하지만 나의 잘못된 판단은 야근을 만들고 잘못된 분석은 클라이언트 반박으로 이어졌다. 매일 내 한계를 깨는 것 그것보다 더 지옥 같은 일은 없었다. 밥먹듯이 철야를 하고 시간 날 때마다 공부를 해도 부족함은 완벽하게 채워지지 못했다.


 "아.. 사수가 필요해.." 그때부터 너무 막힐 때마다 책임님께 염치없이 연락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고 책임님이었으면 어떤 관점으로 접근했을지. 다행히 현재 그 프로젝트는 순항 중에 있다. 다만 나의 몸과 마음은 괜찮지 않다. 피폐해진 만큼 실력은 올라갔고 미친 듯이 성장했지만 뭔가 나의 부족함을 볼 수 있었다. 아직 꼼꼼하지 못한 기획, 정말 소비자의 관점이 될 수 없었던 것, 언제 비전, 미션을 사용하는 것인지, 데이비드 아커의 브랜딩 기법은 무엇인지 등 아직 너무 부족한 점이 많은 주니어 기획자이다.



사수 없이 작업의 퀄리티 올리기

  그럼에도 내가 처한 상황은 사수가 없다. 그러면 사수 없이 어떻게 작업의 퀄리티를 올릴 수 있을까? 솔직히 가장 좋은 방법은 양질의 래퍼런스가 있는 것이다. 비핸스나 브랜딩 에이전시, 브런치에 올라온 이미지 및 글은 중요한 장표 (큰 인사이트)만 보여주고 사소한 인사이트는 볼 수가 없다. 연결점을 확인하기 어려워 어떤 형식으로 클라이언트를 설득시켰는지, 어떤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풀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모든 게 기입된 보고서가 가장 좋은데 역시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


  보고서를 구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한 말이긴 하지만 역산을 해보는 것이다. 결과물을 바탕으로 천천히 올라가면서 문제까지 파악하는 방법. 본 프로젝트 기획과 의도와는 다를 수는 있지만 안 해보는 것보다 나으면 하는 도중에 여러 장표의 스타일이나 인사이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이 올 것이다. 하지만 역산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이게 맞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자신의 기획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올라가는 방안.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레퍼런스 참조, 역산은 실력 쌓기의 방식이라면 마인드로는 어제에 나보다 더 나아지기가 작업 퀄리티 올리기 가장 좋은 것 같다. 버벌, 비주얼 등 한 부분을 대략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아닌 최선을 다해서 전 기획서보다 더 알맞게 만들어 가는 것. 자기의 한계를 자신이 깨려고 하고 프로젝트를 해오던 관행을 깨고 프로젝트에 알맞은 답안을 찾아내는 것. 그런 정신이 있어야 사수 없이 더 좋은 퀄리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여러모로 급할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수가 있는 게 더 맘 편하다.



  기획자에게 사수가 없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없는 대신 당신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다. 다만 그 책임도 오롯이 당신의 몫이다. 더 잘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고, 자신의 결과물이 최선인지 정말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개선하는 사람인가요? 그럼 사수 없는 곳에서도 살아남고 나아가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ps. 다만 적어도 2~3년은 당신을 끌어줄 수 있는 사수와 함께 일 하다가 이 삶을 시작하세요. 제발!


같은 팀이자 긍정 바이브가 넘치는 Becca님

함께 쓰기에 동참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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