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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뇨 Aug 16. 2022

디자인에 대한 역량이 너무 부족해

생각의 틈이 필요하다

오랜만에 전 회사 디자인 팀 수석님을 만났다. 그날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게 우리는 얼큰이 취했고 가까스로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일 대일로 저녁 식사를 가진 자리는 아니었지만, 희미한 정신을 붙잡고 보니 어느새 수석님과 나만 남아 디자인 이야기를 주구장창 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이 분과 단독으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자리가 언제 있을 것이고 20년 차가 다돼가는 디렉터님 이야기를 언제 들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동의를 얻어 클로바노트를 켰다. 물론 내일 이 이야기들을 다 기억할 자신도 없었다.

Cheers와 함께 디자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picture by @isununun


솔직히 한 동안 낯부끄러워 클로바노트를 보거나 듣지도 못했다.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들리는 쩝쩝거리는 입 소리, 주위의 잡음 그리고 상당이 꼬인 우리의 발음. 근데 확실히 그 속에는 혜안이 있었다. 주제가 분마다 달라졌지만 대화의 맹점은 ‘나의 역량'이었다. “쏘뇨, 너 스스로가 디자인에 대한 역량이 너무 부족해.”


디자인 역량이 부족하다는 말은 무엇일까? 수석님은 디자이너 생각을 기다리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디자이너의 마인드가 너한테 공감이 전혀 안 되잖아. 디자이너들은 왜 내가 이렇게 해야 되는지 더 쉽게 객관적으로 노출하지만 너는 기획자로서 그들의 마인드를 이해해주지 않아. 기획자로서 네가 원하는 거 빨리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도대체 무슨 말일까?


당시에는 거칠게 반발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맞는 이야기였다. 디자이너 분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분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분석하려 했었었나? 생각이 흐름을 이해하려 노력했었나?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의 속도는 다르며 생각의 범위 또한 상이하다.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답답했던 부분은 ‘왜 서로 브랜드를 위해서 취해야 할 행동이 다르지?’ 었다. 서로 대화하고 설득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최선의 방향성을 찾는 것은 좋았지만 어느 샌가 대화의 시간은 일반적인 종용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디자이너 분들은 문제에 대해 해석하고 여러 가지를 종합해 연결하며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텐데, 난 생각의 과정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의 상쾌한 느낌 같이 감각이 가지는 질감을 퀼리아라고 하는데, 이처럼 퀼리아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결과로써 형식이 생겨나고 기능을 발견하게 되는 수순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먼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자’라고 결정하고 디자인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만들 수 없는거죠.

- 이케가미 다카시, 『앞으로의 교양』, 항해

브랜드 기획자는 의미를 만드는 것에 매달린다. 물론 그것만이 브랜드 기획자의 모든 일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일이 의미(意味)와 연관이 있다. 의미의 사전 정의는 ‘말이나 글의 뜻',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이다. 브랜드에 관련된 이해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현상을 파악하고 거기에 담긴 뜻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기획자의 머리는 항상 why로 가득 차 있다.


다만 기획자로서 ‘이 브랜드는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를 생각하고 디자이너와 소통하는 것은 무한한 디자인의 가능성에 울타리를 만든 것이 아닐까? 기획자로서 브랜드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고 한정된 의미를 정의한 행위가 디자인의 무한한 해석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팀 허슨의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는 비판적 사고는 창의적 사고와 반대되는 본질적 특성이 있고 비판적 사고는 기본적으로 아이디어를 추려 감당할 만한 소수만 남긴다고 했다. 기획자로서 why는 본질을 찾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가능한 방안을 찾는 것이지만, 디자이너의 입장에서는 한정된 답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진부한 방안을 만드는 것이다.


수석님의 말씀처럼 디자인에 대한 공부를 더 하려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의 시간을 존중하고 생각의 틈을 주는 것. 열린 마음으로 디자이너와 소통하며 의미에 대한 정의보다는 브랜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함께 찾으려 한다. 그것이 나 스스로가 디자인에 대한 역량을 키우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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