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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뇨 Apr 18. 2023

허영심뿐인 브랜드 기획서

기획자로서 조심해야 할 마음가짐

제안이 끝난 뒤 다들 표정이 아리송하다. 오늘따라 유달리 파트너사의 말수가 적다. 미팅이 끝난 뒤 친분 있는 파트너사 PM분이 다가와 의미심장한 말을 하셨다. “쏘뇨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피드백을 드리고 싶었는데, 발표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웃고 마무리 됐지만 퇴근길은 철야를 한만큼이나 무거웠다. PM분의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아 나도 모르게 원인을 찾고 있었다. “왜 이번 보고서는 어려웠을까?”


어렵게 말하는 것은 깊이감이 아니기에

집에 와 기획서를 뜯어보니 어려운 말이 많았다. revitalization, segregation, leverage 등 전문용어와 외래어 범벅이었다. 장표와 장표 사이에는 의미 없는 내용이 많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보이지 않다. 심지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인포그래픽은 제안서에 난해함을 더했다.


WLDO 채널에서 우연히 본 Globant의 광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장표를 가진 전통 컨설팅 펌들을 희화화하고 비난하였다. 그때 웃고 넘겼던 광고에 주인공이 내가 되니 그저 웃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했을까?


출처: globant youtube channel
기획서도 그것은 동일합니다. 읽는 상대, 전하고 싶은 상대를 생각하면서 씁니다. 저는 이것이, 실은 기획서의 비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략) 그래서 저는 평소에도 기획서에는 우선, 상대방이 이것을 듣고 싶을까, 이것을 말해주길 바랄까를 생각하며 그렇게 쓰고자 노력합니다.
- 미즈노 마나부, 『팔다에서 팔리다로』, 이콘


문제의 시발점은 상대방을 위한 기획서가 아닌 우리만을 위한 기획서를 만든 것이었다. 심취해 있었기에, 깊이감을 넣는다는 변명으로 보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기획서를 만들었다. 브랜드의 문제점, 문제점에 따른 솔루션,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 문제 해결 및 브랜드를 위한 보고서가 되어야 했지만 어려운 말의 연속, 거창한 말의 반복,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가능한 단어로 구성된 보고서는 그렇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보고서 리뷰 때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회사의 레퍼런스를 만든다는 이유로 엉뚱한 부분을 집중하고 있었다. 간지러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주지 못하고 상관없는 부분만 긁어주니 클라이언트도 이해할 수 없고 만든 이도 납득할 수 없는 조잡한 기획서가 되었다. 거기다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지 못하니 말들이 점점 어려워졌다. 평이하게 쓰면 인사이트가 없고 내용이 알차보이지 않기에 문장은 길어지고 보고서는 뚱뚱해졌다. 간혹 디렉터나 기획자들은 쉬운 말도 어렵게 쓰고, 쉬운 표현이 있음에도 어렵게 표현해 난해한 보고서를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정말로 브랜드를 위한 행동일까?


바라는 모습, 즉 이상보다는 ‘문제’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춰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를 명확히 이해하고, 현재 시점에서 최적화된 솔루션을 생각하고 발굴하는 것이 기획의 몫입니다. 고객이 생각하는 솔루션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윤주, 『판교의 젊은 기획자들』, 멀리깊이



콕 집어 이야기합시다

이윤주 작가님의 글처럼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요즘 기획서는 간단명료해야 한다. 요즘 콘텐츠 소비의 속도는 어떠한가? short form, shorts 등 짧은 동영상 위주로 많은 사람들이 콘텐츠를 소비하고 짤은 무한대로 바뀌며 트렌드는 Fad(짧은 유행)를 지나 Micro Trend로 구성되어 있다. 콘텐츠 소비가 과속화되는 만큼 기획서를 보는 사람 또한 빠르게 문제를 파악하고 솔루션을 찾고자 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문제를 단순히 정의하고 바로 솔루션을 제공하자는 것은 아니다. 여러 측면에서 데스크리서치를 진행해 데이터를 모으고 FGI로 고객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 수많은 데이터 사이에 연관성을 찾아 새로운 인사이트를 도출해야 한다. 새로운 인사이트로 브랜드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본질을 상기시킬 수 있는 솔루션을 찾는 것이 중요해지는 요즘이다. 최소한의 장표와 이야기로 상대방을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기획서는 지식의 축적이 필요하고, 그 상품의 이야기나 가치를 말해주어야 한다.
- 미즈노 마나부, 『센스의 재발견』, 하루


결국 허영심이 가득 찬 보고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다. 그것은 브랜드를 위한 것도 아니며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냥 자신의 만족을 위한 보고서다.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디자인(설계)을 하는 사람으로서 허울뿐인 기획서가 아닌 문제점과 본질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본 그래픽 디자이너의 대가 하라켄야는 앞으로의 교양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설득할 힘이 없는 것이나 합리성이 없는 것. 이런 것들은 디자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획자나 디자이너는 항상 유의해야 한다. 나의 작업이 설득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그리고 합리성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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