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좀 추천해 주세요.” 취향이 없는 내 친구가 향수에 대해 물어봤을 때 미술관에서 난해한 현대 미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왜? “ 친한 친구는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향수를 산다 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브랜드로 추천해 주세요.” 취향이 없는 내 친구도 향수에 관심을 갖는 시대,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향수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
향수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 향 하나로 내가 있는 곳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뒤바뀌어 버리기도 하고, 기억에서 희미했던 순간조차 선명하게 떠올리게 한다. 향수는 내게도 특별한 존재다. 10대 때부터 사용했던 향수 브랜드를 아직도 사용하기도 하고 머리가 큰 이후부터는 계절마다 향수를 바꾼다.
그동안 사용했던 향수들에는 여러 가지 추억들이 담겨있다. Allure 향은 베네수엘라 시절을 기억나게 하고 Burning Barbershop 향은 영국에서 갔던 barbershop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에는 향에 담긴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해외여행 갈 때마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향수를 꼭 하나씩 사요. 그러곤 여행 내내 그곳에서 산 향수만 뿌리죠.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그곳에서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그때 뿌린 향수로 인해 여행의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르니까 저에게 향수는 ‘기억’인 것 같아요.
- Allure 2016년, 11월호 ‘정유미의 감성적인 순간’
10대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현재까지도 사용하는 향수가 있다. 샤넬의 ALLURE HOMME SPORT 다. 신선한 우디 향수로 만다린 향과 머스크 향이 섞여 있어 여름의 끝자락 냄새가 난다. 도전의 긴장감을 즐기는 남성을 표현한다고 홈페이지에서는 말하지만 운동을 좋아하는 10대가 쓰기에는 무거운 향수다.
처음 이 향수를 사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베네수엘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반나절을 기다린 적이 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천천히 면세점을 돌고 있다가 이 향수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아는 브랜드라곤 샤넬밖이 없었고 옴므라고 적혀있는 말에 덥석 구매했다.
처음으로 산 향수는 독했고 시원했다. 매일매일 뿌리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뿌리는지도 몰라 온몸에 섬유탈취제 뿌리듯이 범벅으로 바르고 다녔다. 냄새가 독해 한참 뒤에 있는 사람도 내가 지나간 줄 알고 있었다. 어느새 Allure은 내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교 시절에도 5년 동안 향수 한번 바꾸지 않고 Allure를 사용했다. ALLURE HOMME SPORT 라인의 모델들을 바꿔가며 사용했다. 마음이 가벼울 때는 은색 케이스에 담긴 ALLURE 향수를 사용했고 진중하고 싶을 땐 검은색 케이스에 담긴 ALLURE 향수를 사용했다.
향은 미묘하게 달랐지만 그걸 알아차릴 만큼 후각에 예민한 친구들은 많이 없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그 향기가 남았고 비슷한 향만 나도 나를 기억했다. 근데 그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사건 사고의 중심에는 자주 내가 있었는데 나의 평판이 깎길수록 향 또한 안 좋은 향으로 인식되었다. 반대로 내 평판이 좋아질 때면 좋은 향으로 인식됐는데 향과 내가 동일시되어 일어나는 기묘한 현상이었다.
아직도 내 향수 박스에는 ALLURE 향수가 자리 잡고 있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못생기고 부족했을 때 나를 표현하는 향수이기에 손이 쉽사리 가지 않는다. 다만 내 젊음을 담고 있기에 쉽게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가끔 어렸을 때의 향수를 느끼고 싶을 때 허공에 향을 뿌리고 있다.
첫 향수라 애정은 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맞지 않은 향이었다. 당시 학원 엘리베이터에서 우연찮게 만난 선생님이 혼잣말로 “내 남친 향수냄새인데..”라는 걸 들은 적 있다. 선생님 나이가 30대 초였는데 박사과정을 밟는 남친이 뿌린 향수와 이제 막 20대가 된 애의 향수와 같다니.. 참 나이에 맞지 않는 향수였긴 하다.
마르지엘라 향수가 갓 한국에 들어왔을 때 쇼핑몰에서 우연찮게 Jazz Club이라는 향수를 맡아보았다. 시향을 하자말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뿔테를 쓰고 수염을 짧게 기른 사람이 재즈 바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장면. 퍼소나를 만들듯이 여러 설정을 붙였는데, 그는 30대 후반이고 디자인 디렉터를 하고 있었다. 맞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다.
글로 적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허세가 한 스푼 들어갔지만.. Jazz Club은 나에게 경험 많은 디렉터의 향이다. 그래서 향수를 매번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뺏다가를 반복했다. Jazz Club을 사용하기에는 내가 부족해 보이고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에 미치지 못했기에 향수를 사는 걸 주저했다. 매번 Jazz Club에 대해 이야기해서 그런지 작년 생일 선물로 Jazz Club을 받게 됐다.
선물 받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향을 뿌려봤지만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첫 향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피부에 닿았을 때도 시간이 지났을 때도 향은 잘 버물어졌다. 다만 마음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 이상향인 그 모습에 내가 도달하지 못했기에 재즈클럽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머뭇거렸다.
아직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이상향에 단기간에 도달하지 못하는 걸 알아 그 이상을 낮춰야 하겠지만 낮추더라도 아직까진 뿌리지 못하겠다. 내가 좀 더 당당해지고 단단해졌을 때나 그런 느낌이 필요할 때 Jazz Club을 뿌려야겠다. 항상 꿈꾸던 이상적인 모습이 되지 못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된 느낌을 받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지난 5년간 매 여름에는 조말론 향수가 함께 했었다. 유명한 Wood Sage&Sea Salt를 사용했는데 첫 향은 좋지만 금세 날아가 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가격도 가격이라 마음대로 뿌리지 못해 재재작년을 기점으로 향수를 바꾸려 했다. 그러다 자라X조말론여사의 협업(ZARA Emotions Collection by Jo Loves)을 듣게 되었다.
곧장 자라로 달려가 emotion 라인을 맡았다. 조말론의 느낌을 낸 향수가 많이 없었지만 Waterlily Tea Dress와 Amalfi Sunray가 가장 조말론을 잘 표현했다. 가격이 5만 원 미만으로 기억하는데 저렴하다 보니 아낌없이 마구마구 뿌렸다. 향이 독하지도 않아 옆사람에게 피해도 끼치지 않았고 향이 어느 정도 날아갔는데 비누향처럼 은은한 향이 남았다.
ZARA Emotion Collection은 사회초년생 때가 담겨있다. 한참 배울 시기에 나와 함께하며 사수들에게 치일 때도 클라이언트에게 치일 때도 내 몸에 착 달라붙어 함께 견뎌냈다. 지난 3년의 여름은 야근 지옥이었다. 프로젝트는 서로 줄지어 들어오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성장할 수 있겠다는 희망찬 마음 하나로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쳐내갔다.
매번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와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누가 구타한 것 같이 아픈 몸을 이끌어 출근하더라도 조말론 향수를 뿌리는 건 절대 잊지 않았다. 속에서 곪아가던 마음의 병이 풍기는 악취를 없애기 위해 열심히도 뿌려댔다.
당연히 올해 여름에도 Waterlily Tea Dress를 사용했다. 용량도 크고 여름만 사용하니 잘 줄어들지 않는다. 글을 쓰며 향수를 확인하니 어느새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향이 마음에 들어 다시 사기 위해 인터넷을 서핑했지만 더 이상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없었다. 20년에 출시된 제품이 단종되어 공식홈페이지에서도 만나볼 수 없다. 기억나면 자라 매장에 가서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겠다. 운이 좋으면 다시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작년까지는 본 것 같은데 말이다. 이 향수를 다 사용하면 내 지난여름의 상처도 사라질까? 잘 모르겠다.
Nonfiction의 Gentle Night은 향수보다 핸드크림으로 먼저 만났다. 옆 동료의 손에는 항상 달달한 향이 났는데 그게 Gentle Night이었다. 겨울에 핸드크림이 많이 사용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Gentle Night은 겨울의 향이 됐다. 생일 선물로 Gentle Night 향수를 받았는데 선물을 준 친구들은 좀 더 젠틀해지라고 말했다.
사회에 나와 맞이한 모든 겨울은 여름에 비해 잔잔했다. 다만 겨울바다와 같이 낮은 파도가 느리게 육지를 오고 갔지만 바람만은 매서웠다. 겨울에 맡은 프로젝트도 천천히 흘러가고 여유로워 보였지만 어느 한순간만큼은 매서웠다. 폭풍처럼 피드백을 받거나 추가 요구사항이 너무 많거나 팀원들과 다투거나 디렉터와 사이가 틀어지거나 등 수많은 일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향을 다시 맡으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Gentle Night의 향은 내 안식처 중 하나였는데 얼마나 좋아하면 바디로션, 핸드크림, 립밤, 향수 전부 Gentle Night이다. 이 정도면 가로수길에 있는 Nonfiction 타일 하나정도는 내가 깔지 않았을까? Gentle Night을 즐겨 쓰는 이유는 단순하다. 잘 어울리기 때문에 날 잘 표현한다 생각하기에 겨울마다 찾게 된다. 겨울에 난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고 포근하며 누구에게는 차분하고 차가웠으면 한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Gentle Night을 사용하지만 모든 향수는 그 사람에 피부에 닿을 때 향이 바뀐다 했다. 나는 나와 Gentle Night이 함께 만드는 향은 모른다. 다만 그 향이 다른 사람에 강하게 기억됐으면 한다.
어쩜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결의 향수를 고를 수 있는지. 그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 하나하나가 자신과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일 테다.
- 이유운,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 아침달
향수가 1개인 사람도 10개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향수에 자신의 어릴 적이 담겨 있을 수도 있고 어느 장면들이 포개져 있을 수 있으며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 향수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 이렇게 어지럽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나만의 흔적이 담긴 향수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오늘도 계절향수를 뿌리고 나갈 준비를 한다. 내게서 묻어나는 향이 나를 표현하는 향이길 바라며 신중히 손목에 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