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협업 방안, 무드보드
기다려지는 약속이 있다.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본다던지 여행을 가는 날이라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이벤트를 미리 준비해 놓고 그날만 오길 기다린다. 나에게 첫 번째 회사 디자인 팀 수석님을 만나는 건 그런 느낌이다. 매번 좋았다고 할 수 없지만 술이 거하게 취하면서도 insights를 두둑이 챙겨 올 수 있는 날이 수석님을 만나는 날이다. 수석님은 어느새 ‘이사’님이 되어있었고 이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다. 브랜드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한 팀이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일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 했다. 대행사 대표님이라면 한 번 정도는 시도했을 프로젝트 아닌가. 내가 이전에 몸 담았던 회사 둘 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많은 회사에서 진행했던 것처럼 브랜드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한 팀이 되어 일을 끝까지 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각자의 성향이 있고 일하는 스타일이 있기 때문에 일하는 방법을 다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제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오래된 회사일수록 암묵적인 프로세스는 존재한다. 결국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일하는 방법을 새로 만들기 어렵다.
이전 회사도 그랬다. 그래픽을 잘하는 디자이너 분들이 많았고 브랜드 디자인 look 만드는 프로젝트만 주로 하던 회사였다. 그러다 보니 브랜드 전략과 디자인이 함께 가는 프로젝트는 거의 없었다.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일하는 것이 생소한 곳이었다. 생소하다 보니 서로의 입장 차이로 자주 다퉜고 서로의 입장을 연결시켜 줄 협업 방안이 필요했다. 1년 넘게 주먹구구식으로 협업하다 한 순간에 협업 문제가 풀렸다. 뉴욕에서 온 디렉터님의 포트폴리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무드보드였다.
디자인과 학생이라면 수업 시간이나 과제를 할 때 무드보드를 한 번 정도는 만들어 봤을 것이다. 한 키워드 등을 중심으로 여러 이미지와 레퍼런스를 붙여 만드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이런 방향으로 디자인 하겠다’를 보여주는 디자인 지표라고 볼 수 있다. 영국 UCA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캐서린 교수는 아래와 같이 무드보드 프로세스와 의미를 정의했다.
먼저 브랜드의 지향점을 말로 정의하고, 거기 맞는 이미지와 단어들을 모아서 무드 보드를 만든다. 무드 보드는 디자인 프로세스의 초반 단계에서 흔하게 쓰는 시각적 리서치 툴이다. 완성한 무드 보드를 디자인팀과 고객사 브랜드 매니저들이 함께 보면서 정서가 브랜드의 지향점에 제대로 수렴하고 적중하는지 확인한다. 무드 보드를 통해 브랜드 정서에 대한 공감대가 마련됐다면, 이제 브랜드 정서를 뒷받침할 컬러, 이미지,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을 본격적으로 탐색한다.
- 캐서린 슬레이드브루킹, 『브랜드를 만드는 힘은 직관이나 감성이 아니다. 촘촘한 실무의 단계들이다. 디자인이다. 』, 홍디자인
브랜드의 지향점을 말로 정하는 것이 첫 step이다. 대체적으로 브랜드의 지향점은 AP나 브랜드 전략 기획자들이 설정하는데 협업을 위해선 지향점을 설정할 때도 설득이 따라와야 한다. 첫 단추부터 삐걱거리면 안 되므로 데이터를 모으고 흐름을 만들어 디자이너 분들을 먼저 설득해 보자. 이후 브랜드의 지향점이 합의가 되면 함께 이미지, 레퍼런스 모은다. 무지성으로 레퍼런스 이미지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무드보드는 레퍼런스 보드가 아니다. 지향점을 표현하는 레퍼런스 이미지도 찾되 지향점을 표현하는 이미지도 또한 찾아야 한다. 전문 용어로 reference image와 imagery를 함께 찾아야 한다.
이미지를 찾았으면 디지털 상이든 오프라인 상이든 이미지를 모으고 이름을 붙여보자. 전문 용어로 Affinity Mapping(친화도 분석)으로 수집된 정보들을 연관성 따라 분류하고 계층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후 그룹마다 유사점을 찾아내 핵심을 파악하는 것이다. Affinity Mapping을 하며 자연스레 이야기 나누는 것이 그냥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이미지를 찾은 사람은 왜 이런 이미지를 찾았고 이미지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위계가 있는 조직이라면 Affinity Mapping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팀장님이 facilitator(진행자)를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질문하며 대답을 끌어내자.
이미지를 하나씩 제거하고 이야기하며 grouping을 했다면 1-3가지 공통된 방향성이 도출된다. 이게 무드보드 A안, B안, C안이 될 것이다. 무드보드에서는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진행하는 감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한 팀이 될 수 있다. 무드보드를 1-2명에서 만드는 건 쉽다. 참여자가 소수여서 합의하는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만약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 5-6명이 무드보드를 함께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각자의 사고방식과 입장 차이로 무드보드가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기억해야 하는 건 무드보드를 만들면서 각자의 생각을 들어보며 조율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생각의 조율과 조화를 무드보드로 하는 것이다.
아까 말한 대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한데 모으고 들어보며 조율하기에 무드보드가 효과적이다. 조율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라 서로가 생각하는 의견을 합치에 1-3개의 무드보드로 방향성을 함께 만드는 것도 협업을 윤활하게 만드는 key이다. 그리고 무드보드는 결과물이 있다. 둥둥 떠다니는 단어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단어와 이미지의 조합이다. 그렇기에 생각의 간극과 모호성을 줄일 수 있다.
무드보드는 그림이나 말, 다른 물질까지 결합해서 브랜드와 연관된 감정을 포착한다. 특정 이해관계자가 여러분의 브랜드를 어떻게 느끼는지 파악하고 싶은데, 표적 집단이 생각을 표현하길 어려워한다면 무드보드가 유용하다. 무드보드는 경험의 맥락에서 브랜드를 통해 분위기를 전달하려 할 때도 모호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데, 특히 대행사에 업무 지시를 내릴 때 유용하다.
- 대런 콜먼, 『브랜드 경험 디자인 바이블』, UX Review
세계적인 디자이너 Rick Owens(릭 오웬스)는 New York Times 인터뷰에서 무드보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드보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무드보드는 모두에게 많은 것을 설명한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어디서 영감을 받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랐으면 한다.(의역)” 이와 같이 무드보드는 쉽고 빠르게 생각을 전달한다.
이전 회사에서 유니콘 기업의 Cosmetic PB 브랜드를 만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화장품 분야도 잘 모르고 이미지의 감도가 낮아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은 지 모른다. 무드보드 단계로 들어섰을 때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Awake your color’라는 브랜드 컨셉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미지를 찾아왔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동의하는 큰 두 가지의 무드보드(mood direction)를 만들었다. 서로 다른 취향과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브랜드의 컨셉을 중심으로 서로를 섞어가며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었다. 그 방향성은 브랜드와 맞닿아 있는 무드보드를 만들었고 손쉽게 클라이언트를 설득했다.
현재까지도 그 무드보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브랜드는 같은 톤을 유지하고 있다. 브랜드 전략 기획자와 디자이너가 힘 합쳐 만든 브랜드는 단어와 이미지가 함께 결합돼 일관된 이미지를 전달한다. 무드보드로 함께 방향성을 만드는 것,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함께 토론하며 방향성을 만드는 것, 그 두 개가 결합돼 좋은 협업을 만든다.
아이덴티티 디자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물론 로고, 서체, 컬러를 비롯한 베이직 시스템이지만, 브랜드 경험은 브랜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어떤 톤 앤 매너로, 어떤 접점을 통해 고객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등을 통해 완성되지요. 그 때문에 저는 디자인이 반영된 결과물을 깨끗하게 촬영해서 정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촬영된 사진의 무드가 브랜드가 전하고자 하는 개성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큐리, 『사람, 디자인, 브랜드』, CLASS101, 전채리님 인터뷰 中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의견을 뭉개지 말고 사소한 것들도 들어주면서 무드보드를 만들어가자. 감도 낮은 이미지가 있을 수 있고 말도 안 되는 이미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미지를 무시하지 말고 왜 그 이미지를 선정했는지 이야기를 들어 보자. 그리고 이미지 결을 기조 아래 함께 묶어보자. 이미지들을 빼고 넣고 하며 서로 긴 시간 동안 이야기하며 하나의 방향성이 만들어진다. 비록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게 기획자와 디자이너를 한데 모으는 가장 빠른 길이고 프로젝트를 한 마음으로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