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크롬 죽이기

by 쏭스



오늘 지나가다가 기아의 K7 2020년식을 보고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출시된 지 5년 조금 넘은 차가 90년대 차처럼 느껴졌다. 범인은 전면부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크롬 그릴이었다. 마치 힙합 가수가 웃을 때 금니가 번쩍거리는 것처럼 과해 보였다.


개인적으로 크롬은 부담스러운 소재다. 고광택 처리된 크롬은 지문과 흠집에 쉽게 노출된다. 시간이 지나면 백화(白化) 현상이나 물때가 남아 지저분해진다. 무엇보다 사진기자인 나는 크롬에 자주 카메라를 든 내 모습이 반사돼 곤란할 때가 많았다. 다행히 요즘 자동차 디자인에 크롬 사용이 줄어드는 것 같아 반갑다.


자동차의 디자인이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다는 건 과장이 아니다. 자동차는 냉장고나 소파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는 물건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자주 노출되는 사물이고, 디자인 교체 주기도 짧다. 그래서 자동차 디자인은 당대를 관통하는 ‘멋’의 기준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때 산업 디자인에서 크롬은 가장 ‘기초적인 임플란트’였다. 내구성, 방열 효과, 부식 방지 등 실용적인 소재였다. 자동차에 본격적으로 적용된 건 1930년대. 미국의 GM과 포드는 라디에이터 그릴, 범퍼, 휠 캡 등에 크롬을 입혔다.


크롬 몰딩의 황금기는 1950~60년대 미국차다. 캐딜락 엘도라도, 쉐보레 벨에어 같은 모델은 전면, 측면, 후면을 모두 크롬으로 감쌌다. 당시 크롬은 부의 상징이자 기술력의 과시였고, 고급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1970~80년대에는 일본과 유럽 자동차에도 크롬 몰딩이 점차 확산됐다. 도요타 크라운, 닛산 세드릭 같은 일본의 고급 세단은 창틀, 도어 핸들, 펜더 등에 크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한국도 현대 그랜저, 대우 로얄살롱 등에서 크롬 떡칠을 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절제된 디자인이 고급스러움으로 인식되며, 광택보다는 질감과 조화가 더 중요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테슬라다. 테슬라는 2020년을 전후해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디크롬(dechrome)’ 디자인을 본격 도입했다. 모델 3과 Y는 사이드미러, 창틀, 도어 핸들에서 크롬을 제거하고 매트 블랙 트림으로 대체했다. 이는 “이건 자동차가 아니라 이동하는 전자기기”라는 정체성을 강조한 결과였다.


흥미로운 건, 소비자들 역시 ‘크롬’을 단순한 장식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크롬 죽이기’라는 튜닝이 유행했다. 창틀, 손잡이, 엠블럼, 그릴 테두리에 붙은 크롬 몰딩을 랩핑 필름이나 블랙 도장으로 덮는 방식이다. 제조사가 넣은 것을 소비자가 다시 지운다.


이 흐름은 이제 제조사도 인지하고 있다. 현대·기아, BMW, 아우디 같은 브랜드는 아예 ‘그래비티’나 ‘블랙 에디션’ 등 크롬을 생략한 트림을 앞세우며 소비자와의 감각 차이를 좁히고 있다.


반짝이는 화려함보다, 무광의 질감과 절제된 면이 멋스러움의 기준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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