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팜탄 소녀, 셔터를 누른 건 누구였나

by 쏭스


‘전쟁의 공포’(일명 네이팜탄 소녀) 사진의 원본 필름. AP는 현재 두 조각의 필름만 소장 중이다. AP


최근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 〈The Stringer〉가 베트남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네이팜탄 소녀’ 사진의 촬영자, 닉 우트의 저작권에 의문을 제기했다. 요즘처럼 촬영 시간과 카메라 기종 정보가 자동으로 기록되는 디지털 시대였다면 애초에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름 시대의 사진기자들은 필름을 언론사에 맡기고 나면 현상과 인화가 끝날 때까지 자신이 어떤 장면을 담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통신사 내부의 업무 처리 방식, 프리랜서 사진기자의 불안정한 입지, 그리고 전장의 혼란 속에서 뒤섞였을지도 모를 필름.


한 장의 사진을 두고, 네 명의 기억이 충돌한다. 관련 기사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색해 보았다.


① 닉 우트 (AP통신 기자·퓰리처상 수상자)
1972년 6월 8일, 나는 사이공(현 호찌민)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를 취재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철수하려던 찰나, 뜨랑방에 네이팜탄이 떨어졌다. 근처 사원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중 아홉 살 소녀 판 티 킴 푹은 옷이 모두 타버린 채 울부짖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러고 난 뒤 다친 아이들을 취재 차량에 태워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다. 아이들을 맡기고 지국으로 돌아가면서 사진이 제대로 찍혔을 지 걱정했다. 그날 찍은 사진으로 나는 퓰리처상과 세계보도사진상을 받았다. 신출내기 사진기자였던 나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됐다. 내 삶을 바꾼 그 사진은 지금도 거실 한편에 걸려 있다.


② 응우옌 타인 응에 (스트링어)
나는 NBC 팀의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평소엔 장비를 나르고 취재 차량을 몰았지만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날 갑작스러운 폭격이 마을을 덮쳤을 때 나도 카메라로 달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찍었다. 나는 그 필름을 AP통신에 넘겼고 20달러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 날 내 사진은 닉 우트의 것이 됐다. 그는 정직원이었고, 나는 스트링어(비정규직 프리랜서)였다. 그는 유명해졌고, 나는 잊혔다. 왜 이제서야 고백하냐고? 그땐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지더라. 죽기 전에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사진을 찍은 건 분명히 나였다.


③ 칼 로빈슨 (포토 데스크)
나는 사이공 AP 편집국에서 포토 데스크를 맡고 있었다. 그날 뜨랑방에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과 함께 필름이 도착했다. 현상된 네거티브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처참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그 필름에 촬영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누가 찍었는지도 모르는 사진을 두고 마감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사진부장이던 호르스트 파스가 조용히 말했다.
“우트가 찍은 걸로 해.”
당시에는 프리랜서보다 사내 기자의 이름이 우선시되는 게 당연한 풍토였고, 그런 식의 조율은 조직 내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내가 덮어버린 진실은 이후 평생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④ 데이비드 버넷 (또 다른 스트링어)
나는 당시 타임지와 라이프지에 사진을 제공하던 스트링어였다. 그때 나는 필름을 빼내고 있었다. 내 라이카 카메라는 필름 교체가 유독 까다로운 기종이었다. 그 순간, 멀리서 불기둥이 솟구쳤고 아이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우트가 제일 먼저 뛰쳐나갔다. 젠장! 겨우 필름을 갈아 끼운 나는 30초가 지나서야 그를 따라잡았다. 그 30초 때문에 나는 우트가 킴푹을 카메라로 담는 순간을 눈으로만 봐야 했다. 몇 시간 뒤, 나는 AP 현상실 밖에서 사진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트가 아직 젖어 있는 5×7 흑백 사진을 들고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 전 세계 신문 1면을 장식할 그 사진이었다. 반면 그날 내가 찍었던 사진들은 수십년 넘게 아카이브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네이팜 소녀 사진의 오리지널 밀착 인화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 두 컷의 필름 조각만이 남아 있다. 즉, 직접적인 물리적 증거 없이 기억과 진술에 의존한 상황이라 논란은 종결되지 못한 채 지금도 진행 중이다.


AP통신은 90페이지 분량의 자체 조사 보고서를 통해 닉 우트의 저작권을 유지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조사에는 현장 목격자 인터뷰, 3D 공간 재현, 카메라 분석, 사진 프레임 비교 등이 포함됐다. 결론은 “우트가 촬영자가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였다. 반면 월드프레스포토는 “촬영자를 특정하기엔 충분한 자료가 없다”며 ‘저자 미상’으로 처리했다.


나 역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약 응에의 주장대로 그가 찍은 사진이라면 AP 내부에서 퓰리처상 수상 자격이 있는 정직원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우트로 기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저널리즘 윤리의 문제이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구조적 격차가 만들어낸 비극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도 질문할 수밖에 없다. 우트가 정말 그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같은 현장을 공유했던 사진기자들이 50년 동안 침묵했을까? 사진기자들은 타인의 거짓된 성공에 조용히 넘어갈 양반들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이 논쟁은 시사점을 던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풀(pool) 취재’가 관행처럼 굳어졌다. 이는 선발된 일부 기자들이 다수 언론을 대표해 촬영한 결과물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각 언론사마다 캡션 처리 방식이 달라 촬영자의 이름과 소속을 아예 빼는 ‘편의상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 지금은 촬영자를 확인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그때 남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사진’들일지도 모른다.


촬영자의 이름이 지워진 순간 사진은 모두의 것이 되면서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처럼,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엇갈리는 기억과 증언은 진실을 조각내고 왜곡시킨다. 훗날 한국 사진기자 사회에서도 ‘제2, 제3의 네이팜 소녀 논란’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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