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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Su May 17. 2023

다정도 병이라

나만의 제주, 이튿날.


제주에 오면 꼭 한번 들러보고 싶었던 책방 <풀무질> .


 머무르는 마을에서 도보 20분 정도 거리에 있어 제주 이틀째 날의 일정은 그 곳으로 정했다.

 오랜만에 온 제주에서의 하루를 어떻게 하면 느릿하면서도  또 알차게, 마음에 흡족하게 잘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머무르는 게스트하우스 <마음스테이>에서는 간단한 아침을 제공했다.

식빵 두 개를 토스트 기계에 집어 넣고 툭!하고 갈빛으로 바삭하게 구워진 모습으로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

직원분이 내려주신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마시기 좋게 식어주기를 잠시 기다렸다.

동그랗고 묵직한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열어둔 통창에서 불어들어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나처럼 혼자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각자의 아침 시간을 즐기고 사라졌다.


첫 일정은 비자림으로 향했다.

버스로 15분 남짓 걸리는 만족스러운 거리에 꼭 가보고 싶었던 비자림이 있다.

수년 전 도로를 확장한다며 비자림의 일부를 벌목하는 문제로 꽤나 이슈가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한 바퀴의 산책이 부족해 한 바퀴를 더 돌고 나왔다

우거진 고목들의 터널을 지나며 눈코귀가 호강했다.

청량한 새 소리도 좋았고, 피톤치드 가득한 숲의 향기도 , 도란도란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좋았다.

그냥 다 좋았다. 이 곳에 있다는게 참, 좋았다.


제주는 버스가 자주자주 있는 편은 아니기에, 돌아갈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시간을 확인하고 정류장으로 내달렸다.

천천히 느릿느릿 걸었던 숲에서의 나는 어느새 우사인 볼트 못지 않았다.

버스 맨 앞자리, 통창으로 길이 펼쳐지는 자리에 앉았다.

구불구불 좁은 도로인데도 기사아저씨의 터프하나 빈틈없는 운전에 나는 좀 있다 안전벨트를 꽉 조여 매었다.


버스에서 내려 땡볕을 20분 넘게 걸었다. 양산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나는 익어버리고 말았을 것이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같은 느낌에 코끼리 그림이 그려진 작은 입간판을 만났다.

조금 이르게 비건 파스타로 배를 채웠다.

목적지에서 약간의 샛길로 벗어난 것이 신의 한수, 알고 보니 알음알음 찾아서 오는 맛집이었다고 하니, 땡볕을 걷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선물하나 툭 누가 던지고 간 것 같았다.


가게를 나서 눈앞의 나즈막하고 예쁜 건물이 궁금해 다가가보니, 내가 가려던 책방 '제주 풀무질' 이었다.

소심한 환호를 내지르고 책방 문을 열었다.

주인장과 어느 분이 한참 담소를 나누고 계셨는데, 책의 이야기들이었다.

책방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화주제다. 나아가 그곳에서 가질 수 있는 독서모임에 대해서도 안내가 이뤄지는 걸 보니, 이 곳에 오래 머무른다면 꼭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떠나는 이는 별 수 없는 일.

아쉬움을 옆으로 휙 치워버리고 책들을 솜솜 뜯어보았다.

곳곳에 깃든 책방 주인장의 정성들이 곱다.

후미진 구석 자리 하나마저 놓치지 않고 사랑스런 사진과 액자, 머물다 간 사람들의 명함과 편지글들이 촘촘했다.

풀무질에 살고 있는 책들 중에 내가 눈여겨보던 책들이 많아 또 한아름 구입하고 말았다. 책방에 들어가면 아무리 내 취향이 없어도 단 한권이라도 구입하고 나오는게 나만의 의식이자 단정하게 차리는 예의였다. 이 곳에서는 사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이 어려웠던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창가에 앉아 그 중 한 책을 읽는데 자꾸 심장이 두근거렸다. 현실같지 않은 곳에 현실같지 않게도 내가 있었다..

실실 웃음도 나고, 심장이 고장난 듯 쿠궁, 찌르르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주인장은 들어서는 손님마다 참으로 다정했다.

오래 알아온 단골을 맞이하듯 편안하게 말을 건네고, 키우는 개들을 소개했다.

서울의 풀무질을 청년에게 멋지게 넘기고, 제주에 새로운 풀무질을 다시 열었다는 풀무질의 사연과 어느새 책방주인의 삶을 30년 이상 하고 계시다는 , 책과 책방에 진심인 이 분이 참으로 따뜻했다.

몇 시간을 머물렀다 미니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건너편의 카페에 들어섰다.


책방주인의 안 주인분이 남편을 위해 당근주스와 케이크를 주문해두고 오매불망, 배를 곯는 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켜둔 지 한참인데 주인장은 오지 않는다.

통창 너머로 보니, 손님과 다정히 이야기 중이다.

이 손님 가시면 저 손님, 또 들어오는  손님과...

내게 건넨 따스함을 누군가들에게 나누고 있었다.

아내분의 귀여운 투정에 내가 말했다.


"너무 다정하셔서 그래요. "


다정도 병이라.

아내분이 웃음 지었다.

한참이 흘러 내가 카페를 뜰 무렵, 책방주인이 카페에 들어섰다.

다시 올거라는 정해지지 않은 약속을 하며 인사를 드렸다.

다정함에 빠져 영업 마감시간까지 나오지 못할수도 있는 이 곳, 제주책방 <풀무질>에서,

나는 기대 한 만큼의 훨씬 그 이상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좋아서 눈물 날 것 같은 일들이 참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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