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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Dec 22. 2022

[씨 O ] 어떤 단어가 떠오르세요?




우리 집은 자기 전 루틴이 있다. 잠 잘 준비를 모두 마친 후 침대에 쏙 들어가 엄마와 10분 이야기 시간을 갖는 것. 오늘은 둘째 먼저다. 아이는 학교에서 포켓몬카드를 친구와 교환했는데 더 센 걸 얻었다는 자랑을. 난 주로 도서관이나 마트에서 생긴 일들을 풀어낸다. 한동안 뜸했다가 최근 들어 다시 하게 된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질리지도 않는다는 끝말잇기다. 대부분 아이가 먼저 시작한다.



[라듐] → [   !   ]



"야아아아아앗"

"아하하 알겠어. 엄마 미안. 다시 하자!"

"그래 달이 니가 먼저 시작해"



[행복]   →   [복숭아]  →   [아저씨]  →   [    !    ]



순간적으로 [씨 O] 이 떠오른다 젠장. 책 좀 읽는다고 자부했는데 깨끗하게 읽어서 깨끗하게 다 잊은 건지 떠오르는 단어가 저렴하기 그지없다. [씨앗]이라고 재빨리 말하고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쓰는 사람으로서 바람처럼 스쳐간 찰나의 생각을 붙잡아야 된다. 


"잠깐만! 엄마 메모 좀 해야 돼!"  

"엄마, 영감님 오셨어? 뭔데? 나한테도 말해줘"


맞은편 방에서 나의 열혈구독자 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묻는다. 어떡하지. 씨에서 끝나서 [ O] 이 떠올라버린 미천한 단어 수준을 까발려야 하나.

우린 친밀도가 높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는다.


"솔직히 듣자마자 욕이 생각나는 거야. 엄마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거 있지? 그래서 글감으로 남겨두려고."

"아 그래? 그럼 영감님 가시기 전에 글 쓰고 올래? 나는 엄마 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어"



영감님이 급히 떠나기 전 글쓰기를 독려하는 별이는 든든한 아군이다. 나의 글을 가끔 첨삭도 해준다. 첫 글을 쓸 때 [내 기억 속에는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 [내 마음속에는 울고 있는 아이가 있다]로 바꿔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엄마 내가 책을 좀 많이 읽잖아?  대부분의 책은 마음속에는 이라고 시작하고 내가 읽기에도 그게 더 자연스러워"라고 말하면서.




별이와의 대화에 잠시 끊긴 끝말잇기를 달이가 훅 치고 들어온다.

"앗은 뭐가 있더라? [앗차가워] 이제 엄마 해"

"응? 그게 뭐야 하하하하하하하"








가장 고요한 시간 새벽 5시.  오늘도 책 속 문장을 한줄한줄 꼭꼭 씹어 읽는다. 평생 쓰는 사람이고 싶어서.

몸도 마음도 게 늙어 노트북 자판을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근사한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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