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취함존중 Dec 20. 2020

힙스터불상 은진미륵의 쇼미더머니

출장 아닌 논산 찐투어 (1)

2020년에는 주말에 잘 쉴 수도 없었지만 가뭄에 콩나듯 쉴 때 조차 온전히 일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다.


어떤 회장님들은 자기는 창업하고 한번도 쉰 적이 없다는 말을 잘만 늘어놓던데 아마 물리적으로는 휴양지에서 띵가띵가 보내면서 그 와중에도 사업 계획, 아이템 생각을 한다는 소리로 들렸고 나란 인간은 출장 핑계를 대고라도 조금 쉬어보려 했으나 한번도 온전히 일과 업무에서 떨어져 있지를 못했다. 그나마 부산 출장가서 숨통 좀 틔워 볼까 했지만 업무 관련 동행이 있는 데다 강행군이라 여러모로 신경쓰여 쉰다는 기분은 1도 들지 않았다.


2020년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한해를 온전히 살아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기억이 남을 법한 시간이었기에 나에게도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연말인데다 길어지는 코로나 사태로 내년 사업 계획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주말 전 목금 평일 2틀을 빼내어 논산에 다녀왔다. 마침 사회적경제 쪽에서 만난 예전 인연이 탈서울하여 논산으로 이주한 덕에 혼자사는 친구를 느닷없이 방문하는 숙식처 급마련의 행운과 함께. 번아웃까진 아니었어도 거의 탈진 상태에 다다른 터라 사실 여러 군데 알아보기도 귀찮았고 가족과도 떨어져 오롯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특히 논산의 그 친구는 마음 휘트니스, 명상 관련 회사를 운영했었기에 관심사나 이야깃거리를 나눌 게 많아 사적으로도 밥을 먹거나 얘기를 나누는, 비즈니스로 만나 친구로도 오래 유지된 손꼽는 인연 중 하나다. 흔쾌히 방문을 허락해 준 친구 덕분에 양평 수련원에서 요가 수행이나 할까 하던 생각을 접고 좀 더 느긋하고 편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마침 얘기하다 보니 이 친구야말로 2003년 한국요가연수원에서 지도자과정을 밟은 경험이 있어(난 지도자 아님) 석산리 얘기를 하자 그냥 자기 집으로 오란다. 아무튼 세상은 좁고 결국 이렇게 이판이든 사판이든 끼리끼리 만나게 되나 싶다.


3, 7호선 고속터미널역, 호남선 센트럴시티 방면에서 논산가는 직행버스를 탈 수 있다. 중간에 휴게소를 15분쯤 들렀다 가도 2시간 10분이면 넉넉하게 도착한다.


도착한 첫날 저녁은 친구가 차려놓은 푸짐한 집밥에 논산 양촌막걸리 한잔이 함께했다. 친구는 한살림을 애용하는 덕에 대부분이 유기농인 데다 간도 세지 않아 밥과 반찬을 금새 뚝딱 비워냈다.


건강잡곡밥에 불고기와 잡채, 김장김치가 함께하는 집밥


외식 대신 집에서 맛난 걸 먹었으니 손수 절여 만든 대추차가 맛있다는 근처 찻집으로 밤마실을 나갔다. 원래 충청도쪽은 대추가 유명한 곳이 많다. 전국 팔도 다녀보고, 우리나라 농산물로 술을 만드는 전통주 관련 일을 하는 나이기에 사실 더욱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로컬로컬 하지만 우리나라가 워낙 좁은 탓에 한 지역이 온전히 어떠한 특산물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가져가긴 좀 어렵다. 현재의 지역 특산물들은 먼저 브랜딩을 선점하여 홍보한 자가 임자인 경우가 대다수. 논산 쪽 대추는 산지라서라기 보다 교통의 요지로서 유통 집결지인 때문이란 얘긴 익히 들었다. 개인적으론 충남-충북-경북 일대의 대추가 다들 비슷비슷하다. 하하하 ;;;



차라기 보다는 결죽한 죽 느낌의 한방대추차. 뭔가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친구 덕분에 퍼실리테이션 줌 세미나도 참여해보고 쉬러가서 공부하는 나여, 잘했다. 짝짝짝!


둘째 날은 일어나자마자 고구마를 껍질 째 갈아넣어 손수 만든 고구마 스프에 논산 딸기로 배를 채우고 20년째 장롱면허로 보관만 하다 최근 중고차를 한대 샀는데 후진 주차가 어렵다는 친구를 위해 1시간 주차 연습을 봐 주기로 했다. 원래 지방일수록 차 없으면 살기 어렵다.


사실 스스로에게 놀란 게 단 한번도 윽박지르거나 화 내지 않고 원리를 잘 설명해서 벌벌 떠는 친구를 가르쳐 줬다는 거. 추운 바깥에서 주차선 밟는지 아닌지 봐 줘가며 운전석에서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어떻게 보고 핸들을 풀었다 열었다 하는지 설명만으로 친구가 잘 배운 것 같아서 뿌듯했다. 집에 딸기도 있다 해서 첫 방문임에도 아무 것도 못 사서 들어왔는데 최소한 밥값은 한 것 같다.



고구마 스프와 논산 딸기


논산의 자랑(?), 시민운동장을 걸어 올라가면 반야산이 나온다. 산이라기엔 언덕같은 느낌이지만 한켠에 관촉사와 은진미륵을 품고 있으니 이름 한 번 잘 지었다. 특히 발목이 여전히 무리하기에 힘든 나에겐 경사가 가파르지 않고 15-2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만한 코스라 기분좋게 도전할 수 있었다.


처음엔 관동8경도 아닌 논산8경이라며 소개하는 친구의 말이 농담인 줄 알았지만 막상 도착해서 은진미륵의 위엄을 접하자니 왜때무네 그토록 친구가 자랑을 했는지 알 것 같더라. 내가 왕년에 인도나 동남아 좀 다녀본 사람인데 보통 이쪽 불상들은 스케일이 다르다. 일단 크다. 그리고 화려하다. 특히 황금색을 좋아하는 태국같은 나라엔 몇 미터짜리 황금 불상이 수두룩 하다. 캄보디아나 미얀마 쪽엔 앙코르와트를 포함해 돌로 만들어진 정교한 탑이나 유적들이 많다.


논산8경에 대한 소개는 아래 사이트에서 상세히 볼 수 있다.

https://www.nonsan.go.kr/tour/html/sub02/020201.html



고향이 대구라 불국사는 밥 먹듯이 가보았으나 그쪽 지역 불상들은 자애롭고 아름답긴 하나 은진미륵과 같은 포쓰는 없다. 왜 친구가 #쇼미더머니 라 했는지 보자마자 이해가 되었다. 요즘 햏들이 좋아할 만한 덕질 요소를 넘나 갖추고 있는 거. 특히 저 손가락! 검은 눈! 두꺼운 입술! 삼지안과 송과체의 보랏빛!


저 오늘부로 은진미륵 팬하고 힘들면 기 받으러 와야겠어요 ㅋㅋㅋ


자그마치 18m, 약 40년 간 사람이 직접 돌을 깎아 만들었단다, 레알 덕후 코드 아님?




아아 #은진미륵 #힙스터불상 이여


이런 21세기형 더쿠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을 법한 관상이라니. 한때 문화재형 예비사회적기업을 지냈던 나였으나 울타리를 넘어 은진미륵 거대한 도포자락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느라 꽤나 힘들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본 은진미륵불, 내 스탈 불상을 드디어 만나다!


아아, 만져보고 싶었어요. 왠지 그 커다란 기운과 포쓰가 내게 전해질 것 같았어요.

(찌질하닼ㅋㅋㅋㅋㅋ)


강경 쪽으로 나가면 옥녀봉이 있다 하여 지는 노을을 쫓아(헤드라인 사진) 저녁도 먹을 겸 젓갈 상회가 늘어선 금강으로 향했다.



역시 여행의 꽃은 맛집!

사실 지방 출장을 많이 다닌 탓에 강경 젓갈 마을은 여러 번 지나치기도 했고 젓갈 백반도 먹어봤었다. 특히 서해-남해로 이어지는 태안, 군산, 목포 같은 해안 도시들엔 젓갈이 대부분 밑반찬으로 많이 나오기도 해서 나나 친구나 짠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구글맵 평점이 젤 높은 복어맛집, 태평식당으로 향했다.


복어 매운탕 vs 지리, 당신의 선택은?
애탕(우)이 서비스로 나오는 거 실화?



충남 음식은 서울 음식에 비해 양념이 풍부하지만 전라도 보다 감칠맛이나 매운맛이 덜 하고 깔끔한 편이다. 밑반찬은 충남 백반집에 가면 나오는 기본 나물에 김치, 젓갈 1종이 있는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이었다. 하나씩 맛 보는 중 복어탕이 나왔는데 이거슨 대박!





서울 복어집에서 먹는 고기 몇점 든 스타일이 아니다. 스케일이 다르다. 수북한 미나리를 걷어 내면 복어 1마리가 통째 들어있다. 게다가 복어 이리 끓인 탕을 서비스로 주시다니, 이거 레알 실화각? 우리가 깔끔하게 비운 밥상 안 찍어놓은 게 못내 아쉽다 ㅋ 사실 여자 둘이 각각 한 그릇씩 먹기엔 양이 적지 않았는데 깔끔하게 밥 한공기에 이리탕까지 싹싹 비우고 반찬도 클리어~ 난 거기다 청하까지 1병.


친구는 원래도 술을 잘 마시지 않는 데다 운전을 해야 하기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청하 한병을 시켜 2/3병 정도 마시고 나머지는 김치찌개 끓일 생각에 남겨왔다. 뼛 속까지 뭘 안 버린다능 ;;;


집에 와서는 메리크리스마스 컬러링을 끝내고 뿌듯한 마음으로 타로술사로 변신하여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고 스스로 내린 결정에 대한 지지, 논산 생활에 대한 격려를 나누었다. 듣자 하니 작년에 산 컬러링인데 1년 동안 못 끝내고 있다가 같이 끝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끝내고 나니 뭔가 성취감도 들고 대표 DNA가 남아서인지 컬러링 하면서도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하는 두 사람이 너무 웃겼다.



나는 타로를 비롯한 대부부의 술학 도구들을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가 아닌 서로의 마음을 터 놓는 계기, 혹은 내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하나의 매개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차피 나의 우주는 융의 동시성 이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헤르메스의 우주론을 짬뽕해 놓은 데다 내 나름의 가설까지 얽혀 있기 때문에 결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이므로 나한테 뭐 물어보면 무조건 "너 지금 잘 하고 있어. 하던대로 해"라는 말만 듣게 된다.


그러니 내게 당신의 미래와 발복을 묻지 말자 ㅇㅋ? 대신 묻지 말고 스스로 대화해 보자. 그건 내가 어느 정도 도울 수 있으니


여러 고민 끝에 사업 보다 지역에서의 삶과 사회적경제를 택한 친구의 발복과 응원을 진심으로 빌어주고 많이 단단해진 그녀의 모습에서 내년에 계획한 일들이 다 잘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2020년의 견딞은 나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많은 부딪힘과 갈등 속에 자신을 비워내고 또 다져내는 한해가 되었으리라.


지구의 모든 인간들에게 건투를 빈다.


(2)편에서 계속 To Be Continued

https://brunch.co.kr/@ssoojeenlee/146



매거진의 이전글 개태사 가마솥이 건낸 지폐 1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