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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함존중 May 30. 2022

좋은 상품의 정의를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1만 시간으론 부족하다

제품, 특히 소비재를 개발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방산시장, 을지로, 두성종이를 모를 수가 없다. 이 곳을 거치지 않고 패키지를 만들기는 어려우니까. 


전공도 경력도 없이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전문가가 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나다. 아마 2만 시간은 족히 될 것이다. 디자이너도 아니면서 질 좋은 종이에 환장 하고 더 나은 제품을 위해 어김없이 오늘도 을지로-충무로 사이를 헤매는 중.


같은 색의 스펙트럼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종이의 텍스처도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쌓은 노하우는 이제부터가 진짜다. 


돈을 받고 클라이언트의 제품을 개발하는 동안, 단 한번도 100% 만족한 적이 없었다. 2018년 즈음에 정부용역을 하면 직원 4-5데리고 20억은 쉽게 하겠다는 걸 알았는데 에이전시를 메인 비즈니스로 할 바에 직장 다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번 돈을 전부 떼려넣어 술다방과 술구독 서비스를 오픈했다. 


젊은 나에게는 패기와 용기, 무모함이 전부였다. 


술구독을 하면서 시장과 경쟁사 조사를 해 보니 구독으로 20-25억까지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근데 이게 패러독스 게임이었다. 한계가 명확하면서 내가 누누이 강조하는 ‘좋은 기획=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베네핏이 돌아가는 기획’인가에 대해 명백히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냥 돈이 아니라, 떼돈을 벌 것인가? 이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해관계자가 함께 누릴 수 있는가? 


계획되지 않은 적자, 성장가능성의 명백한 한계, 때마침 들이닥친 코로나의 3단 콤보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개발한 게 한강, 남상, 광화문 3가지 서울을 브랜딩한 술과 하반기 출시될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을 테마로 한 한국의 대표 전통주다.


클라이언트 잡을 하는 모든 회사들은 "이렇게 하면 잘 될 텐데"라는 매우 사소하고 디테일한, 하지만 결과적으론 눈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몇 가지 포인트를 결국 돈을 주는 "갑"님을 위해 포기하고 눈물을 삼키며 하라는 대로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나처럼 디자인 안목은 커녕 매번 "싸게"만을 외치는, 기획-브랜드-디자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시골 양조장, 영세한 식품업체를 상대해 본 디자인, 브랜딩, 마케팅 업계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 지역은 결코 상상만큼 순박하거나 따스하지 않다는 것을.


이번에 서울술을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출시 준비를 하면서 시제품 1천 개 생산단가를 공유했더니 양조장 사장님들이 더 싸게 할 수 있다면서 공장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싸게 하는 곳은 전국 다니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싸게 하면 싸게 만든 티가 나요.
좋은 술을 정당한 가치에 걸맞게 비싸게 팔고 싶다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죠.


컨셉-스토리-네이밍 세가지의 콜라보로 브랜드가 시작되고 톤-매너-소재를 거쳐 디자인이 완성되며 전략-채널-프라이싱이 가미되어 비로소 "마케팅"이 시장에 랜딩한다.


여기까지 9가지 3종 세트에 SCM까지 얽힌 전체 10단계 프로세스를 모두 이해하고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사람이 나말고 과연 누가 있을까? 공정 설계 및 기계 커스터마이징까지 머릿속에 그려서 최적의 인적자원까지 연결하는 사람, 바로 접니다.


언젠가 뚜쉐(가운데 빨강이)로 꼭 패키징 해 보고 싶어!


최근에 서울과 궁궐의 브랜드를 테마로 제품 출시를 준비하면서 만나는 많은 분들과 바로 당장 일로 연결되지 않아도 좋은 정보를 많이 주고 받는데 최근에 두리하나 스튜디오랑 미팅했다가 수입지 유통사 위디자인페이퍼를 알게 되어 또 발에 땀띠나게 쫓아가서 황홀경에 빠지는 중이다.


바로 영업사원이랑 미팅잡아서 다음 날 미팅하고 제품을 이렇게 또 한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중이다. 


2015년에 아황주 기획해서 내 놓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건 디자이너들이나 하는 영역이라 여겼고 뭔지도 잘 몰랐다. 이제는 어떤 디자이너들 보다는 내가 훨씬 이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하고 있으며 정보도 많다. 심지어 나는 브랜드-패키지-서비스까지 전천후로 미친 기획들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가장 오래 근속한 사람들이 몽땅 디자이너였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인쇄 후의 유통 공정, 그 과정에서 파손 여부와 술이 샜을 경우의 대비를 생각해서 종이 질감과 탄(력)성 뿐만 아니라 코팅, 두께, 가격, 제품 완성 후의 단가까지 머릿 속에 자동으로 그려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거기다 출시 후 어떤 채널로 유통하고 그 과정에서 비용은 어떻게 태울지 본연의 마케팅 역량까지 장착했기 때문에 끈질기게 내가 원하는 수치를 시장에서 증명하는 것만이 이 모든 프로세스의 진정한 완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은 집념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요즘은 내 머릿속에 있는 걸 어떻게 끄집어 내어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작고 빠른 실패와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나는 잘 만들고 존버하는 사람이었다면 올해의 나는 잘 파는 사람과 내가 터득한 걸 전부 나눠주는 사람으로, 내년의 나는 판을 잘 까는 사람으로 단계별로 내가 목표로 하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오늘 아침 읽은 책에서 인간들은 진정성에 대해 정의할 순 없어도 진정성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금방 알아차린다고 하던데 정보가 오픈되고 생존이 해결된 사회에서 정신과 영성은 훨씬 고도화될 수 밖에 없으니 현존하는 인류는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실현될 수 없기에 역시 도전해 볼 만한 영역이다. 진정한 탈중앙화는 이상의 철인 정치와 맞닿아 있다. 


궁극의 아름다움만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팬톤 컬러칩을 시리즈로 산 이후 가장 벅찬 순간 중에 하나랄까? 샘플북 보면서 행복해 하는 나

심지어 이거 다 돈주고 사야 하는데 우리 회사에 기꺼이 증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신 영업팀으로 부터 전부 공짜로 받음! 일하다 탈진하면 종이 만지고 있어야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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