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으론 부족하다
제품, 특히 소비재를 개발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방산시장, 을지로, 두성종이를 모를 수가 없다. 이 곳을 거치지 않고 패키지를 만들기는 어려우니까.
전공도 경력도 없이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전문가가 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나다. 아마 2만 시간은 족히 될 것이다. 디자이너도 아니면서 질 좋은 종이에 환장 하고 더 나은 제품을 위해 어김없이 오늘도 을지로-충무로 사이를 헤매는 중.
우리가 쌓은 노하우는 이제부터가 진짜다.
돈을 받고 클라이언트의 제품을 개발하는 동안, 단 한번도 100% 만족한 적이 없었다. 2018년 즈음에 정부용역을 하면 직원 4-5데리고 20억은 쉽게 하겠다는 걸 알았는데 에이전시를 메인 비즈니스로 할 바에 직장 다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번 돈을 전부 떼려넣어 술다방과 술구독 서비스를 오픈했다.
젊은 나에게는 패기와 용기, 무모함이 전부였다.
술구독을 하면서 시장과 경쟁사 조사를 해 보니 구독으로 20-25억까지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근데 이게 패러독스 게임이었다. 한계가 명확하면서 내가 누누이 강조하는 ‘좋은 기획=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베네핏이 돌아가는 기획’인가에 대해 명백히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냥 돈이 아니라, 떼돈을 벌 것인가? 이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해관계자가 함께 누릴 수 있는가?
계획되지 않은 적자, 성장가능성의 명백한 한계, 때마침 들이닥친 코로나의 3단 콤보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개발한 게 한강, 남상, 광화문 3가지 서울을 브랜딩한 술과 하반기 출시될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을 테마로 한 한국의 대표 전통주다.
클라이언트 잡을 하는 모든 회사들은 "이렇게 하면 잘 될 텐데"라는 매우 사소하고 디테일한, 하지만 결과적으론 눈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몇 가지 포인트를 결국 돈을 주는 "갑"님을 위해 포기하고 눈물을 삼키며 하라는 대로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나처럼 디자인 안목은 커녕 매번 "싸게"만을 외치는, 기획-브랜드-디자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시골 양조장, 영세한 식품업체를 상대해 본 디자인, 브랜딩, 마케팅 업계 사람들은 누구나 안다. 지역은 결코 상상만큼 순박하거나 따스하지 않다는 것을.
이번에 서울술을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출시 준비를 하면서 시제품 1천 개 생산단가를 공유했더니 양조장 사장님들이 더 싸게 할 수 있다면서 공장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싸게 하는 곳은 전국 다니는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싸게 하면 싸게 만든 티가 나요.
좋은 술을 정당한 가치에 걸맞게 비싸게 팔고 싶다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죠.
컨셉-스토리-네이밍 세가지의 콜라보로 브랜드가 시작되고 톤-매너-소재를 거쳐 디자인이 완성되며 전략-채널-프라이싱이 가미되어 비로소 "마케팅"이 시장에 랜딩한다.
여기까지 9가지 3종 세트에 SCM까지 얽힌 전체 10단계 프로세스를 모두 이해하고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사람이 나말고 과연 누가 있을까? 공정 설계 및 기계 커스터마이징까지 머릿속에 그려서 최적의 인적자원까지 연결하는 사람, 바로 접니다.
최근에 서울과 궁궐의 브랜드를 테마로 제품 출시를 준비하면서 만나는 많은 분들과 바로 당장 일로 연결되지 않아도 좋은 정보를 많이 주고 받는데 최근에 두리하나 스튜디오랑 미팅했다가 수입지 유통사 위디자인페이퍼를 알게 되어 또 발에 땀띠나게 쫓아가서 황홀경에 빠지는 중이다.
바로 영업사원이랑 미팅잡아서 다음 날 미팅하고 제품을 이렇게 또 한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중이다.
2015년에 아황주 기획해서 내 놓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건 디자이너들이나 하는 영역이라 여겼고 뭔지도 잘 몰랐다. 이제는 어떤 디자이너들 보다는 내가 훨씬 이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하고 있으며 정보도 많다. 심지어 나는 브랜드-패키지-서비스까지 전천후로 미친 기획들을 해왔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 가장 오래 근속한 사람들이 몽땅 디자이너였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인쇄 후의 유통 공정, 그 과정에서 파손 여부와 술이 샜을 경우의 대비를 생각해서 종이 질감과 탄(력)성 뿐만 아니라 코팅, 두께, 가격, 제품 완성 후의 단가까지 머릿 속에 자동으로 그려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거기다 출시 후 어떤 채널로 유통하고 그 과정에서 비용은 어떻게 태울지 본연의 마케팅 역량까지 장착했기 때문에 끈질기게 내가 원하는 수치를 시장에서 증명하는 것만이 이 모든 프로세스의 진정한 완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은 집념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요즘은 내 머릿속에 있는 걸 어떻게 끄집어 내어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작고 빠른 실패와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이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나는 잘 만들고 존버하는 사람이었다면 올해의 나는 잘 파는 사람과 내가 터득한 걸 전부 나눠주는 사람으로, 내년의 나는 판을 잘 까는 사람으로 단계별로 내가 목표로 하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오늘 아침 읽은 책에서 인간들은 진정성에 대해 정의할 순 없어도 진정성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금방 알아차린다고 하던데 정보가 오픈되고 생존이 해결된 사회에서 정신과 영성은 훨씬 고도화될 수 밖에 없으니 현존하는 인류는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실현될 수 없기에 역시 도전해 볼 만한 영역이다. 진정한 탈중앙화는 이상의 철인 정치와 맞닿아 있다.
궁극의 아름다움만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다.
팬톤 컬러칩을 시리즈로 산 이후 가장 벅찬 순간 중에 하나랄까? 샘플북 보면서 행복해 하는 나
심지어 이거 다 돈주고 사야 하는데 우리 회사에 기꺼이 증정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신 영업팀으로 부터 전부 공짜로 받음! 일하다 탈진하면 종이 만지고 있어야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