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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앱 들어가 보니 사진에 이어 게시판도 많이 복구된 것 같던데(원래 되었었나? 난 최근 발견) 쓴 글이 대부분 2004-2006년이고 딱 20대 중반 정도 되는 시기였는데 세상세상 중2병이 이렇게 심각할 수 없더라.
20대 초반의 나는 뷰티에 빠져있던 시기라 5년 동안 향수를 엄청나게 모았는데 사진에 보이는 만큼 아래 선반에 더 있다고 보면 된다. 게시판이라 사진이 한장만 올라갔던 것 같다.
그때 당시에 주로 화장품과 향수를 구매하던 밍키라는 사이트가 있었는데 여기는 커뮤니티 게시판이 따로 있어서 후기가 엄청 올라왔다. 나는 당연히 탑5에 드는 향수 시향기를 쓰는 사람이어서 향수를 살 때 마다 감상평을 쓰는 재미도 쏠쏠했다. 역시 관종은 타고난다, 그리고 영원하다.
지금이야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올리브영에서 백화점까지 다양한 곳에서 여러 종류의 향수들이 천차만별 가격에 팔리고 있지만 그때는 해당 브랜드 화장품 매장에서만 살 수 있었다. 즉 샤넬 no.5는 샤넬 화장품 매장, 리멤버는 디올 매장, 포엠은 랑콤 매장에서만 살 수 있었고 지금처럼 이세이미야케, 캘빈클라인이나 토미힐피거 같은 뷰티라인이 없는 패션 브랜드 향수들만 모아놓은 편집숍 따윈 찾기가 어려웠다.
남들 졸업 준비하고 바쁘던 시기에 휴학하고 2003-2004년에 첫배낭여행으로 혼자 몇달 인도를 다녀와서 뷰티 아이템을 전부 팔거나 선물로 나눠줬다. 학교 다니는 동안 여러 이유로 수회에 걸쳐 4학기 정도 휴학을 했는데 그때는 이런 사람들이 잘 없었고, 여자 중에는 특히 더 없어서 졸업하는 친구들이 나 뿐이라 사진도 타이밍을 놓치고 못 찍고 안 찍어 졸업앨범도 없다. 군대 갔다온 선배들하고 같이 졸업했다.
요즘은 당근마켓도 있고 SNS랑 물류도 발달되어 있어 인터넷으로 금새 뭔가를 팔아치우는 게 일도 아니지만 그땐 중고나라랑 밍키 커뮤니티 게시판 정도? 이렇게 써놓고도 실행에는 꽤 오래 걸려서 처분하는데 1-2년 걸린 것 같다. 내가 제일 아끼던, 아니 내 체취랑 잘 맞다고 생각했던 랄프로렌 로맨스랑 한국에서 정말 구하기 힘들던 대여섯개만 남겨놓고 팔거나 선물로 뿌렸다. 로맨스는 나중에 한국에선 단종되어 일본 갔다 공항 면세점에서 발견하고 2통 정도 큰 용량을 샀는데 결국 20대 말 부터는 향수를 아예 안 뿌리게 되어 반병 정도 남은 걸 최근까지 갖고 있다.
요즘 내가 소주를 취급하면서 이때 생각을 많이 하는데 기본적으로 향수의 80-90%이상 에탄올이 함유되어 있고 증류주 맛의 70% 이상은 향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저때 얼마나 향에 빠져있었냐 하면 심각하게 프랑스 최고의 향수 전문 대학 이집카 유학을 고려할 정도였고 미국 계신 분이랑 연락해서 직구(그땐 이런 말이 없었다! 그냥 아는 분께 부탁한다 정도 ㅋ)로 구하거나 귀국할 때 수고비 주고 부탁해서 수집한 애들이었다. 어디서 돈이 났냐면 위에도 써 있지만 알바, 특히 과외를 많이 했다 ㅋㅋㅋ 과외해서 돈 버는 게 즐겁기도 했고 경제적 독립이야 말로 진정한 독립이기에 집에서 뭐라든 멋대로 살 수 있었다.
내가 오드비(eau de vie, 생명의 물)라 불리는 증류소주에 빠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탁주 약주 과실주에 비해 증류주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향에 의존한다. 내가 소주 제품을 개발하면서 디퓨저와 향수 개발까지 손대는 건 20년 전 부터 내정된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먼저 매혹되었다. 누구나 아는 것은 재미없고 나만 알아야 흥분되었다. 내가 얼빠라서 하는 말인데 잘생긴 남자는 벗겨봐야 아는 것이다. 벗기지 않고도 알아봐야 진정한 선수다. (옷 말고 내면이요)
술 공부하던 시절 미각에서도 타인들에 비해 절대 우위에 있었지만(미세한 미각 농도 맞추기 15기까지 통틀어 다 맞춘 사람 나 포함 딱 2뿐) 향이야 말로 내가 우리나라에서 그 누구도 하지 않던 시기에 휩쓸던 분야였지 않은가? 그때 시향기를 쓰는 심정으로 소주의 풍미를 표현하면 된다. 내가 왜 혀와 맛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이렇게 현타는 갑자기 찾아온다. 이래서 올해 나는 계속 회귀하고 재회하는구나.
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