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2. 그래서 어디 계시다고요?
2013년 12월의 어느 날.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 어, 엄마. 왜? ”
“ 통화할 수 있어? “
“ 응, 말해. ”
“ 외숙모한테 전화가 왔는데,
괜찮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한 번 만나보라고. “
“ 뭐 하는 사람인데? “
“ 공부하다가 취업준비 중인가 봐. ”
“ 엥? 몇 살인데 취업준비 중이야? ”
“ 서른둘이라지 아마? “
하아…엄마…
“ 엄마,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취업준비생을 만나요.
싫어. 안 만나. “
“ 아니, 부모님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대. 그런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면 바르게 자랐을 거 아냐. 그리고 능력이 없어서 취업을 못한 게 아니라 늦게 공부하느라 그렇다잖아. 그냥 한번 만나나 봐. ”
“ 아니, 엄마. 나 안 만나고 싶어요. “
“ 그냥 만나나 보지. 왜…“
“ 아니, 그냥….
엄마, 나 운전 중이야. 다시 전화할게요.”
같은 해 10월에 아빠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빠는 지구별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걸 미리 알고 계셨는지 내 결혼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아빠가 여기저기 주선을 해서 하게 된 맞선 같은 소개팅이 여러 번 있었지만 내 마음이 움직이는 만남은 한 번도 없었다. 번번이 이어지지 않는 만남에 아빠는 속이 좀 상하셨었던 것 같다.
딸이 결혼해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으셨는지,
아빠는 내가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가 담긴 편지를 남기고 하늘로 돌아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난 결혼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정 누군가를 만난다면 무겁지 않은 연애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또 돌아가신 아빠가 아직도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어서 당시엔 연애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첫 번째 제안을 거절했던 거였다. 그가 취준생이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이렇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인연이 닿으려고 했었던 걸까?
얼마 후 엄마는 내게 다시 한번 이야기를 건네셨고, 두 번 거절은 어려워 “만나는 볼게. “라는 말과 함께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그 후로 한 달이 더 지나서야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중에 들어보니 취업 후에 나를 만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해서 연락이 늦은 거였다고 했다. 무튼 그렇게 취준생이 아닌 직장인이 된 그를 나는 만났던 거였다.
손을 흔드는 그를 뒤로하고 난 핸드폰을 열었다.
내 연락을 기다릴게 분명한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잘 만났어요. 엄마. 지금 헤어져서 집에 가는 길.
- 그래, 고마워. 집에 가서 쉬어.
- 네. 엄마.
대체 엄마는 뭐가 고맙다는 걸까? 어찌 되었든 간에
엄마가 좋다니 내 기분도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답해야 할 메시지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어제 만난 그분이 보낸 메시지.
사실 난 어제도 친구의 사촌오빠와 소개팅을 했었다.
“ 착하고 좋은 사람이야. 직업도 좋구. 너 마음도 그런데 위로도 될 수 있고 좋잖아. ”라는 친구의 말.
위로라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그분과의 만남을 약속하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 갑작스런 그 남자(지금의 남편)의 연락으로 약속이 겹치게 되었다.
어쨌든 답은 해야겠기에 메시지를 열었다.
“ 눈 오는데 뭐 하세요? ”
“ 거기도 눈 왔어요? 전 볼일이 있어 잠시 나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에요. “
“ 그렇구나. 조심히 들어가요. “
“ 네. “
핸드폰을 닫고는 차창 밖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내린 눈 덕분에 세상이 더 반짝이는 듯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었다. 아까 다친 무릎이 이제 와서 다시 아파오는 듯했지만, 밤산책이 하고 싶었다. 근처 공원을 잠시 걷고는 벤치에 앉아 오늘 일을
다시 상기해 보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그 남자에게 메시지가 왔다.
“ 집에 잘 들어갔죠? 전 이제 집에 다 와가요. 아까 늦어서 미안해요. 잘 쉬고 우리 또 만나요.”
우리 또 만나요.
또 만나자는 말이 왠지 모르게 따스하게 들렸다. 그러다 머리를 흔들고는 메시지에 어떻게 답을 할지 고민했다.
“ 잘 왔어요. 멀리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잘 자요. ”
(당시 난 수원 그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고는 핸드폰을 멀리 밀어 두고 난 잠을
청했다.
며칠간 두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다음에 대해 고민했지만,
고민이랄 게 있을까 싶었다.
어차피 마음의 소리를 따를게 뻔한 건데.
무겁지 않되 진심으로
마음을 정하고 두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 사람에겐 정중한 거절의 메시지를
또 한 사람에겐 두 번째 만남을 약속하는 메시지를.
토요일 여섯 시 : 포지아모르
약속 장소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지도를 보고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 여기쯤인 거 같은데…
[포지아모르]라는 레스토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잘못 찾았나 싶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혹시 도착하셨어요? “
“네, 저 들어와서 앉아 있어요. ”
“저 근처에 왔는데 레스토랑이 안 보여서요. “
“가게 옆에 ‘문득’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
‘문득’
방금 지나친 곳인데..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 레스토랑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그 옆에 포지아모르는 없었다.
“저 ‘문득’ 앞에 있는데 ‘포지아모르’는 안 보이는데요. ”
“어, 이상하다? 저 그 옆 가게에 앉아 있는데 혹시 안 보이세요?
카페 가까이로 가 옆 가게를 보니 또. 다. 른.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었다.
레스토랑 안을 살펴보니 그 남자가 유유히 앉아 내 전화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전화를 끊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난 자리에 앉으며
“여기가 포지아모르예요? ”
“네, 어.. 아니에요? ”
“아니에요.”
밖으로 나가 간판을 확인하고 오는 그.
“아하하, 아니네요. 이 근처로 왔는데 레스토랑이 보여서 여긴 줄 알고 들어왔어요. “
뭐지 이 남자?
‘난독증이세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추운데 여기서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
“아.. 따뜻한 물 좀 마셔요. “
포지아모르를 못 찾은 건 난데 왜 그에게 화가 나는 건지…
알고 보니 포지아모르는 한 블록 위에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엉뚱한 곳에 그가 있었고 난 그가 있는 그곳 근처를 헤매고 있었다.
우연인 건지… 인연인 건지…
이름 모를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문득’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난 일상기억을 잘하는 편이라 대부분의 일들과
나눴던 대화들을 거의 기억하는데 유독 그 레스토랑에서 나눴던 대화는 기억이 도통 나질 않는다.
카페 안 쪽에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했다.
그는 아메리카노 난 캐모마일 티.
“ 옷을 잘 입으시는 거 같아요. “
“ 저요? ”
“ 네. 지난번에도 오늘도 스타일이 좋아요. ”
“ 아, 그냥 깔끔한 거 좋아해요. “
“ 제가 나름 디자인전공자라 하하. “
그렇다. 그는 디자인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조심스레 왜 이렇게 취업이 늦어진 건지 물었다.
고3 후반기에 기흉(폐에 구멍이 생기는 병이다.) 수술을 받고 회복했는데 그 후로 축구를 하다가 다시 재발해서 2차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간이 꽤 되어서 수능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때문에 지방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여차저차해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무려 5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던 시간이라고 했다.
자기 이야기를 마친 그가 이제 내게 질문을 해오기 시작했다.
“ 혼자 있을 때 주로 뭐해요?”
“ 그냥.. 책 읽거나 음악 들어요. ”
“ 티비는 안 봐요? ”
“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조용한 게 싫어서 그냥 켜두고 지냈는데 이젠 혼자도 괜찮아서 안 틀어요. “
“ 아… 혹시 꿈같은 거 있어요? ”
“ 어… 음… 그냥 여행에세이 같은 책 하나 내는 거요. “
“ 아.. 삽화 내가 그려 줄게요. ”
“ 네? ”
“ 나 그림 꽤 그려요. product 전공이지만요. “
에…? 뭔데 이리 적극적이지? 성격인가?
“ 아.. 네… 기회가 되면요. “
그 뒤로 그는 내 삶의 방향성과 관계되는 질문들을
해왔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말 그대로 화.기.애.애 한 분위기 속에서.
카페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던 그는
“ 추운데 손이 안 들어가요. 멍청하게 바느질을 잘못해서 호주머니가 같이 꿰매졌어요. “
난 무심코 그의 코트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 하하, 왜 이랬어요. “
“ 그러게요. 아 진짜 바보같이. “
“ 내가 나중에 다시 해줄게요. “
“ 꼭 해줘요. 꼭. ”
속으로 ‘ 이 남자 쫌 귀엽네. ’ 하며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 내일은 뭐해요? “
“ 아.. 저 봄방학이라 집에 내려가요. “
“ 아.. 방학이면 학교는 문 닫아요?
“ 아뇨,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근무해요. “
“ 그렇구나. 운전하고 가요? “
“ 아마 기차 타고 갈 거 같아요. ”
“ 그럼 기차에서 문자 해요. “
“ 그럴게요. “
처음부터 이상하게도 그가 편했다. 그냥 내 밑바닥까지 다 보여줘도 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어줄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와의 만남이 더 쉬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린 어느새 세 번째 만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