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물속에서 맘 놓고 까불었다
예쁜애 옆에서 쪼그라드는 나를 보는 게 힘들었다. 오죽하면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도장을 찍던 수영장을 빼먹을까. 언니들은 수영장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몸이 좀 안좋은 것 같아서 쉬겠다고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다들 의심하지 않았다. 예쁜애랑 같이 수영하는 게 힘들어요, 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맘속으로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몸이 아픈 것만 같았다.
수영장을 가지 못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저녁 8시만 되면 내 몸은 물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수영을 하지 않을 때에도 저녁 8시만 되면 양 팔을 돌리고, 배에 힘을 주어 물에 잘 뜰 수 있도록 유선형 자세를 만들고 있었다. 서 있을 때면 명치 아래쪽 배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가 들썩였다. 시끌시끌한 수영장이, 언니들이,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며 강습생을 가르치는 강사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시간이란 마력은 감정이 힘들 때 특효약이 되어주곤 한다. 첫사랑의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바래지듯이, 열등감이라는 고약한 감정이 서서히 바래졌다. 결국 그리움이 열등감을 이겼다. 다시 수영복 가방을 챙겨 수영장으로 향했다. 모두들 여전했다. 일주일 동안 내가 없었다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예쁜애도 여전히 수영을 하고 있다. 나는 이전과 다르지 않게 예쁜애가 인사하면 심드렁하게 반응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쪼그라드는 나를 보는 게 이전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 정체가 열등감이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열등감을 느끼며 수영을 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자 열등감도 옅어져갔다.
차곡차곡 수영이 쌓여갔다. 힘들기만 하던 접영이 조금은 편해졌고,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 걸음을 하던 평영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출렁이며 날 허락하지 않았던 물과도 조금씩 친해지는 것 같다.
물속의 품에 안겨 평안함을 느꼈다. 엄마의 자궁 안에서 안착해서 자라면 작디 작은 몸으로 옴직거린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던 엄마의 자궁 안. 내가 그때를 기억할 수 있다면 아마도 수영장에서 느끼는 평안함과 비슷한 감정이지 않을까. 물론 뱃속의 기억은 전혀 없지만, 잔잔한 물속에서 수영을 할 때면 종종 ‘엄마의 자궁’이 떠올랐다. 수영장이라는 네모난 상자가 마치 엄마의 자궁처럼 상상되었다.
맘껏 까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때! 내 엄마의 자궁인걸. 누군가는 이 평안함을 자유라 부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평안함을 해방이라 부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 평안함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 누구나가 물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니까. 마음 속 서랍장 깊숙이 간직하고 있어서 누가 꺼내지 않으면 절대 찾아지지 않는 그런 기억 말이다. 또는 간직하고 싶지 않아서 꽁꽁 숨겨서 버린 기억들, 하지만 버릴 수 있는 기억은 없다. 버렸다고 믿을 뿐. 수영장의 차디찬 물은 기억의 서랍장을 열어젖히고, 버렸다고 믿었던 것들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