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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부치다

결혼이라는 강을 건너_11

by 홍시

“희연아 이번 제사는 찬수랑 솔이랑 꼭 같이 참석해야 한다. 우리 집은 명절보다 제사가 더 중요하다. 아버지 누나들도 모두 올 거고, 너도 와서 거들어야지.”


시어머니의 전화에 희연이는 갈께요 라고 대답했다. 시댁과 친정의 집안 분위기는 천지차이였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친정은 1년에 2번 있던 제사도 한 번으로 줄이고 제사 음식도 시장의 반찬가게에서 사다가 올렸다. 대신 가족들이 모여서 먹을 음식은 제사음식과 별도로 준비했다. 예전과 다르게 제사음식에 손이 잘 가지 않자, 희연의 엄마는 발빠르게 변화를 받아들였다. 시댁은 달랐다. 1년에 4번 있던 제사를 2번으로 축소한 것은 비슷했다. 하지만 음식준비에 있어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변은 그랬다.


“너희 시아버지 누나들이 제사음식을 꼭 챙겨가려고 한다. 그러니 넉넉히 준비해서 챙겨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시아버지가 어찌나 성을 내는지. 나물은 10가지로 만들어서 나물비빔밥 해먹고, 전은 회양전, 생선전, 부추전, 김치전이다. 나머지는 시아버지가 직접 생선을 구울테니 희연이는 여기 앉아서 전만 부치면 된다.”


집안의 법도를 가르치려 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희연이는 잠자코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하면 으레 그래야 하는 걸로 알았다.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는데, 이걸 굳이 또 싸가야 하나, 집에 가져가도 잘 안 먹을 것 같은데. 이렇게 속으로만 되씹으며 넓은 전기팬에 기름을 두르고 계란 옷을 입혀 굽기 시작했다. 시아버지는 방 안을 폴폴 기어다니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움직이는 솔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뒤 쫓아다녔다. 집안의 첫 손주라 애지중지하는 눈빛이었다. 아토피 때문에 고생한 터라 측은함도 더해졌다. 찬수의 말에 따르면 생전 자식 이쁜 줄 모르고 산 양반이라고 하던데, 손주는 다른가 보다. 얼마나 예뻐하는지, 솔이의 뒤 꽁무늬를 쫓아다니며 어질러진 물건은 치우고, 침 흘리면 닦고, 솔이 먹을 것 대령하라고 호통하기에 이르렀다.


“솔이 먹을 것 좀 해놔. 지금 잘 먹어둬야 잘 크는데. 소고기 좀 사다가 죽 좀 만들어봐.”


시어머니는 이 바쁜 와중에 솔이 죽까지 해야 되냐고 눈치를 주지만, 시아버지의 명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냉동고에서 소고기 덩어리를 꺼내 잘 게 다져서 이내 죽을 만든다.


찬수는 방에서 잠을 잔다. 드르렁 코고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어머니는 찬수가 얼마나 피곤하겠냐, 일하랴, 애 돌보랴, 운전하랴 몸이 성하지 않겠다, 희연이가 들으라는 냥 찬수의 고생을 설파했다. 희연이도 찬수의 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오로지 찬수의 편에서만 얘기하는 모양새에 그만 짜증이 밀려왔다.


전을 부치는 일은 그냥 일이었다. 전 부치는 일 때문에 토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시댁에만 가면 인간을 세분화해서 계급을 나누고, 그 계급의 맨 끄트머리가 희연이라는 것을 상기하게 만든다는 것이 기분을 고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하지만 사회라는 집단은 인간의 평등을 원치 않았다. 어떻게든 서열을 만들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줄지어 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처럼. 희연이는 고약한 기분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뒤집개를 요리조리 뒤집으며 전을 구웠다. 오로지 전을 굽는 사람으로만 남기 위해, 아무 생각도 없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이름도 사는 곳도 잘 모르는 고모들이 차례차례 도착했다. 고모는 총 4명이었다. 다들 목소리가 컸다. 생김새는 제각각이었지만 어쩐지 성격은 엇비슷하게 닮은 것처럼 보였다. 고모들은 희연이를 보자마자 “아이고 네가 고생이네. 애 키우느라 욕 본다. 뭔 음식은 이리 많이 하노”하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나마 노고를 알아주는 것 같아 얼었던 마음이 살살 녹았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시어머니의 표정이 묘하게 얼버무려졌다.


“누가 보면 내가 시집살이 시키는 줄 알겠네. 얼른 왔으면 앉아서 밥이나 먹어요.” 시어머니는 고모들을 앉히고 내내 음식을 먹였다. 배를 불리게 하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제사상을 차려 절을 했다. 희연이는 한 귀퉁이에 서서 절하는 모습만 빤히 쳐다보았다. 절하는 저 사람 속에 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어서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릴 뿐이었다.


제사를 마치고, 다들 술을 한 잔씩 걸쳤다. 시아버지도 모처럼 모인 가족들을 앞에 두고 기분이 좋았는지 한 잔, 두 잔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고모들도 마찬가지였다. 얼큰하게 취했는지 시아버지의 연설이 시작된다.


“내가 오늘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희연이가 이렇게 와서 제사상도 차리니, 내가 며느리 하나는 잘 얻은 거 같다. 희연이를 처음 봤을 때, 서울내기라서 깍쟁이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희연이는 깍쟁이는 아닌 것 같아. 내 마음에 얼마나 드는지.”


시아버지의 말을 받아서 첫째 고모가 말을 이어갔다.


“그러게, 오빠는 복도 많수. 어떻게 희연이 같은 며느리를 딱 하고 얻었냐 말이지. 요즘 집 한 칸도 마련 안하고 결혼하는 남자가 어딨수. 오빠는 봉 잡은 거야. 요새 여자들 결혼도 안하려고 하는데, 찬수는 일찌감치 걱정 놓았네. 내 딸도 벌써부터 결혼 안한다고 나에게 선포하지 뭐유. 그리고 세상이 변해서 며느리가 제사상 준비하는 것도 옛날 문화지. 요즘에 이렇게 제사 참여하는 며느리가 어딨수.”


연신 며느리를 잘 봤다는 소리였다. 희연이는 칭찬으로 보여 지는 그 말들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존재가 며느리구나. 시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고모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처지가 묘연하게 슬펐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마음속에서 작동되어 혼자만의 상상을 펼쳐보았다.


제사는 찬수의 조상이니, 찬수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희연이는 모른 채한다.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입었던 옷을 벗어던지고 희연이가 좋아하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시댁으로 온다. 전 부치는 양이 많다고 외치며 그대로 뒤집개를 놓는다. 친정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친정 제사가 있다고 집에서 전을 부치던 희연이는 없었다. 그런 날을 핑계로 집 밖에서 느긋하게 사람들과 술 한 잔을 걸칠 수 있었다. 부모에게 일부러 잘 보이기 위해 특정한 옷을 입은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다.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다고 땡깡도 잘 부렸다. 그야말로 친정에서는 눈치 볼 사람 하나 없는 무적이었다. 짧은 상상을 마치고 희연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다소 곳이 시어머니가 선물로 주었던 옷을 입고, 전을 부친다. 희연이는 자꾸 물음표가 올라오는 머릿속을 파헤치고, 마침표를 찍었다. 더 이상 묻지 말자. 지금의 전 부치기에만 신경을 집중하자. 그렇게 전부치는 기계가 되어 온 몸에는 기름 냄새가 서서히 베였다. 시어머니는 기름 냄새가 베일 것을 염려해 희연이에게 옷을 갈아 입으라고 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머니가 주신 이 옷을 입고 전을 부칠께요.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희연이는 연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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