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것은 단순히 귀를 기울여준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다.
우리는 흔히 친구와 가족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되묻곤 한다. 과연 그게 진짜 내 이야기였을까. 때로는 단지 역할 수행에 필요한 말만을 떠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내 이야기를 꺼내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고, 상대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검열부터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라고 말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아니요’라고 생각해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관계라는 그물 속에서, 나는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적당한 말만 내뱉는다.
그래서인지 연애는 언제나 가장 황홀한 대화였다. 사랑에 빠졌을 때만이 상대의 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그때야말로 듣기의 가장 높은 경지를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어렵다. 눈앞에 ‘스마트폰’이라는 강적이 버티고 있어서다. 집중해야 할 순간, 알림음 하나에 대화는 가차 없이 끊기고 만다. 내 이야기가 그렇게 동강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오면서, 나의 이야기는 점점 자취를 감췄다. 아이의 이야기, 남편의 이야기, 가족의 이야기, 사회의 이야기… 어느새 그 모든 것이 내 자리를 대신했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멈추어 서지 않았다면, 아마 영영 잊은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남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는 일조차 버겁게 다가왔다. 자기 생각에 잠겨, 넘쳐나는 생각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을 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말을 내뱉는 지금의 나는 어떤 기분인지 깨닫게 된다. 듣는 이는 단순한 청자가 아니라, 말하는 이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그렇지만 듣기는 말보다 훨씬 많은 힘을 요구한다. 말은 흘려보내면 그만이지만, 듣기는 그 이야기를 내 몸으로 통과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듣고 난 뒤에도 그 말을 내 안에 쌓아두면 후유증처럼 남아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래서 흘려보낼 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과 마음이 단단히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말을 쏟아내는 시대다. 그래서일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들어주는 이’다. 들어주기 위해 나는 나를 비우고, 내 몸을 돌보고, 내 시간을 마련한다.
이 모든 준비는 너의 이야기를 기다리기 위해서다. 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수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환대를 건네는 셈일 것이다. 그리고 그 환대는 나와 당신을 이어주는 가장 든든한 다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