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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11. 2024

삭막한 인정 투쟁 장 안의 희귀한 미물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정아은

"이 이야기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다소 특이한 업종에 종사하는 한 미물이 제가 속한 직업군의 비밀과 맞닥뜨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다."

-에필로그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작가는 무엇인가


누구나 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시대다. 내면의 울분과 요동을 언어화하다 보니 쓰는 사람이 되어 있고, 어느덧 작가라는 꿈을 꾸게 된 것인지, 독자로만 존재하다 불현듯 나도 작가라 불리고 싶은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인지,  선후 관계가 불분명하다. 누구는 말한다. "독자는 없고 작가는 많아지는 시대"라고. 그 누구는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말하지만, 책 좀 읽는 사람은 모두 알만한 작가다. 오디오로 들려오는 그분의 말에 나는 짐짓 서글퍼졌다. 작가님이 작가가 아니라면 누가 작가일까요. 글을 쓰는 모두는 작가라고 불릴 수 없는 건가요. 어떤 글을 써내야 작가라 불릴 수 있을까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작가는 혹시 문학 전집 책날개에 등장하는 흑백으로 박제된 그 얼굴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살아있는 그 누구도 작가가 될 수 없겠군요. 내 글이 작가의 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현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겠군요.


이 책의 제목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를 본 순간 이 책을 쓴 작가가 궁금해졌다. 생소한 이름의 작가는 자신은 작가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작가가 되었으니, 작가 지망생이라면 꼭 읽고 싶겠지?라는 그 당당함. 어떤 작가는 현시대 독자 없이 작가만 양상 되는 현실을 비판하듯 말하고 있고, 어떤 작가는 본인처럼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며 격려와 응원의 말을 전한다. 방구석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누구의 말에 손을 들어야 하나. 안타깝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 내가 누구의 말에 손을 들 건 말 건.


정아은 작가는 장편 소설로 한겨레 문학상을 타며 등단했다. 6년간 쓰고 공모하고 쓰고 공모하는 삶을 이어가다 절치부심의 마지막 '모던 하트' 장편 소설로 첫 상을 받게 되었다. 작가로 불리려면 그래 6년은 써야 한다. 쓰는 몸으로 살아야 한다. 10년이 걸릴 수도 있는 걸 짧게 운 좋게 6년이 걸린 거다.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는 공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형상이지만, 그 행운이라는 것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했다. 6년 동안 하나만을 위해 쓰는 몸으로 살았기에 행운이 찾아온 것일 테다. '모던 하트'를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하고자 했다니. 그럼에도 쓰는 사람은 안다. 절필은 현생에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책 에필로그 부분에서 언급한 작가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진솔하게 뱉어냈으나 작가라는 스스로에 대해 천착하지 않으면 읊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작가는 한 번 진입 장벽을 넘어가면 몇십 년 동안 자리가 보장되는 라이선스 형 직업이 아님을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로서, 우리 종족에게 부과된 천형을 분석하고... 그렇게 써낸 글이 갈 곳은 결국 편집자들의 심판대와 여기저기서 판매지수가 번쩍이는 삭막한 들판이지만, 그럼에도 쓴다. 쓰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기에.' (309쪽)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막막함에 슬퍼지기도 쓰라림에 아리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라이선스가 통용되지 않는 직업, 매 순간 심판대에 오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마음가짐, 심판대에조차 오르지 못한 숱한 거절의 순간들, 그럼에도 다시 고독을 잘게 잘게 씹으며 나의 내면과 만나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작업. 이 지루하고 지난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 작가들의 운명.



글쓰기는 무엇인가


처음 글을 썼던 게 언제인가 하니, 어린 시절 일기에서부터다. 엄밀히 말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비밀 일기장부터겠지. 사춘기를 관통하며 형식적인 작은 자물쇠가 달린 비밀일기장에 내 마음속 요동들을 게워냈었다. 분노를 일으킨 대상에 대한 욕지거리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겉으로는 둘도 없는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며 속에서는 반항아가 꿈틀거렸다. 그 비밀일기장을 아직 갖고 있었다면 나는 아마 소설을 쓰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 곧 있을 내 아이의 사춘기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는 방법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종이 위에 분출하고 하소연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어떤 글을 쓰고 싶어 할까. 혹은 어떤 글을 읽고 싶어 할까. 어린 시절 비밀일기장에 뱉어낸 글들은 분명 나에게 위안과 치유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형용하기 어려운 들끓는 감정을 손으로 꾹꾹 눌러쓰면서 점차 편안히 가라앉고 잠잠해졌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기억할 수 없지만 대체로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뜰 것이라 희망의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오늘은 눈물로 점철되었으나 내일은 웃는 날이 되겠지라며는. 나조차 내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글로 나를 만나는 일은 그 당시 나에게 위로의 말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쓰기는 나에게 위안이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쓰면서 나아진다. 그게 뭐가 됐든 간에.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쁘나 슬프나, 원고에 대한 거절 메일을 받으나 받지 않으나, 마음을 언어로 옮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것, 그게 글쓰기의 본질이었다. (210쪽)'


환장하는 것, 환장해야 오래 할 수 있다. 환장하는 나를 매 순간 견뎌야 평생 쓸 수 있다. 내 속을 언어로 만들어 내 눈으로 직접 보아야 개운해진다. 정아은 작가가 말하듯, 글쓰기의 본질은 환장에서 나온다. 나를 내가 못 견디는 환장의 힘으로 쓰기는 이루어진다. 다른 여타의 즐거움보다 글쓰기의 환장이 나를 압도해야 쓰는 몸이 된다.


한 가지 더. 정아은 작가의 쓰는 이유기도 하지만 쓰는 사람은 아마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인정 욕구의 화신’


내가 써낸 글은 내가 낳은 자식과 같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만큼 온 진심을 담아 하나의 글을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자식의 성공에 부모의 어깨가 올라가듯, 내가 낳은 글이 다수의 공감을 얻고 인정을 받을 수만 있다면… 상상만 해도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다. 공감 하트 하나에 그날은 하루 종일 행복해지고, 무반응에 그날은 세상이 꺼진다.


작가들은 다를 줄 알았다. 본업이 작가인 그들은 자신이 낳은 글의 대중성이나 본인의 인지도 같은 것은 개의치 않을 줄 알았다. 예술성은 대중성과 반대 방향으로 치달아야 하는지 알았다. 정아은 작가를 비롯해 작가란 사람들은 ‘삭막한 인정 투쟁의 장’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희귀한 생물’이라고 이 책에는 쓰여있다. 불구덩이인 줄 알면서도 욕구 충족을 위해 불속에 뛰어들어가는 미물. 내 글이 나의 이름이 되어 날개가 달리고 나의 정체성은 고귀하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사회에 자리매김한다. 내 머릿속 생각이 활자가 되어 내 눈앞에 펼쳐지고, 펼쳐진 글은 타인에게 다가가 그의 마음속에 크고 작은 울림을 남긴다. 나는 타인과 연결된다. 타인은 나와 연결된다. 글은 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내가, 나의 글이 삭막한 인정 투쟁의 장 속에서 너와 만나는 순간이다.



에세이, 어떻게 쓰는가


이 책에는 서평, 칼럼, 논픽션, 에세이, 소설 쓰기에 대한 정아은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모든 종류의 글을 써본 작가의 장르별 글에 대한 소고를 들을 수 있다. 내가 현재 남기고 있는 이 글도 서평의 일종이 될 수 있고, 일반적인 글이 주관식이라면 서평은 예시가 있는 객관식 글쓰기라고 작가는 비유했다. 서평을 남길 책에서 내가 원하는 부분을 발췌해 내 인생의 경험들과 내 생각을 잘 버무려낸다면 좋은 서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중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에세이 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었다. 정아은 작가는 첫 에세이로 육아 10년 동안의 '엄마됨'에 대한 책을 썼다고 한다. 엄마가 되고 10년이 흐르는 동안 좋은 엄마여야만 하는 강박증이 일순간 폭발하며 '엄마됨'이란 것에 대한 소고를 써 내려갔다고.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며.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그 날것의 감정이 어느 날 편집자에게 가서 책이 되었다고 한다. 그 날 것의 '엄마됨'에 대한 감정이 엄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불편하지만 불편해하지 않아야 하는 감정이었던 걸까. 쓰면서 엄마됨이 치유되었던 작가 자신처럼, 엄마됨을 겪은 엄마들은 읽으면서 치유되었다. '엄마됨'은 엄마가 된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고, 쓰며 읽으며 엄마들은 치유되었다.


'에세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 강한 장르다.' (104쪽)


에세이는 그런 힘이 있다. 쓰는 나를 치유하게 하고, 읽는 너에게 다가가 함께 울고 웃을 수 있게 하는 힘. 보잘것없어 보이는 내 일상이 너의 일상과 만나 우리를 연대하게 하고 이어준다. 잘하고 있어, 토닥토닥. 우리도 엄마가 처음이잖아, 토닥토닥. 뭐든 처음은 어렵고 힘든 거야, 토닥토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누구나 있음 직한 소소한 일상 속 날 것의 감정들을 활자로 만나는 순간 독자는 그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공감하면서 공감받고, 응원하면서 응원을 받는다. 외로운 현실 속에 덜 외로워지는 순간을 만난다. 에세이를 쓰는 이유도, 에세이를 읽는 이유도 이런 순간들을 만나기 위함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일기처럼 보일지라도, 이 일기는 너와 내가 함께 쓰는 교환 일기가 되기도 한다. 학창 시절 한 번쯤 친구와 돌려가며 썼던 교환 일기처럼. 형식과 주제 모두 자유로운 에세이라는 장르는 그런 만큼 품이 넓고 그런 만큼 타인을 너른 품으로 껴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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