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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Jan 25. 2024

죄와 구원

<캉탕> 이승우

"벽의 존재가 벽을 넘을 자유를 보장한다. 벽이 없는 곳에서는 벽을 넘을 수 없다. 벽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캉탕> 19쪽         

 

한때 이승우 작가의 소설을 모두 삼켜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모두 삼켜버려 내 속에서 오랫동안 곱씹고 곱씹다 뭉근하게 되면 그것이 내 온몸에 스며드는 상상을 한다. 그의 소설은 매번 나를 그 속에 빠져들게 만들고, 그곳에서 허우적대다 결국 소설 마지막 장을 허망이 바라보곤 한다. 보통은 책을 읽기 전과 후 뭔가 달라져 있는 나 자신을 만나는데, 그의 소설들은 책을 덮으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회귀본능을 만든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버린 좀 전에 움켜쥐어 내 것이라 여겼던 모래알 같은. 읽은 게 맞나, 과연 나는 무엇을 읽었나, 내 머릿속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혹시 잠시 꿈을 꾼 게 아닐까. 이승우 작가는 손으로 써 내려가며 어떤 주문을 외웠을 것이다. 읽어도 다시 읽고 싶어지게 하리라, 읽어도 읽지 않은 때로 돌아가게 하리라, 내 손에 움켜쥔 것을 어느새 사라지게 하리라.           



캉탕, 또 하나의 바다      


이 책의 제목 '캉탕'은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곳으로, 대서양에 닿아 있는 작은 항구도시이다. 허구의 도시, '캉탕'이라는 이색적인 이름처럼 이 소설도 모호한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멜빌의 '모비딕'과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에 대한 내용들과 거대한 바다와 그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 그리고 그들을 바다로 유혹하는 세이렌의 신화가 곳곳에서 이 소설의 신비로움의 진하기를 깊이 한다.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으려 밀랍으로 귀를 막고 돛대에 자신을 묶었다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와 인신 공양에 관한 내용도 이 소설을 한층 묘하게 만든다.

     

이곳 캉탕에서는 인신 공양 의식이 여전히 남아있어 매년 축제에 '파다'라고 불리는 인신 공양 희생자를 지원받아 인신공양의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인신공양 희생자인 파다들은 바다 한가운데 높게 만든 철제 구조물 위에 서서 바다를 향해 뛰어내리는 행위를 한다. 소설 속 인물 중 해임 선교사 '타나엘'은 스스로 파다가 되어 물속에 자신을 던지고,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바닷속에서 구원받고자 했다.

또 다른 인물, J의 외삼촌인 '최기남' 또한 캉탕으로 이주해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모비딕>의 피쿼드호 선장, 에이해브와 비슷한 인물로 그려진다. 에이해브가 고래를 잡지 못하고 세이렌에게 매혹되어 바닷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최기남도 바다를 항해하다 '나야'(세이렌과 같은 역할)를 사랑하게 되어 캉탕(항구 도시지만 또 다른 바다일지도)에 정박하게 된다. 에이해브는 바닷속으로 침몰했으나, 최기남은 그에게 또 다른 바다가 된 캉탕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캉탕’이라는 곳은 소설 속에서 항구도시로 표현되지만 어쩌면 또 다른 바다를 은유하는지도 모른다. 형식적인 축제지만 인신 공양 의식이 남은 이곳에서 파다로서 희생자가 되어 자신의 죄을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의 존재에서 캉탕은 또 다른 바다로써 그것이 가능한 장소가 된다. 또한 항해를 하다 나야를 만나 캉탕에 정착한 인물을 통해서 이 도시는 또 다른 바다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바다에 침잠하여 구원받고자 혹은 바다에 정착해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에서 캉탕은 오래된 신화나 이야기들에 존재하는 바다의 이미지로 작동한다.      

     


걷는다는 의미     


주인공의 이름은 한중수. 머릿속에 간혹 사이렌이 울려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지는 그. 정신과 의사인 그의 친구 J는 그에게 낯선 곳 '캉탕'으로 가서 요양하도록 조언하고, 그는 그곳으로 가서 '걷고 보고 쓴다'를 계획하고 실천한다. 보려고 쓰려고 걷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걷기만을 위해 걷는다는 계획. 나아가 걷는 의식조차 없이 걷고자 한다. 니체가 만성 두통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을 걸었다는 비유를 들며. 걷는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고 무념무상으로 걷는 행위는 몸의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이나 정신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처럼. 시인 랭보는 '바람 구두 신은' 사람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걷고 또 걷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도 시인이나 철학자가 될 수 있을까.    

 

이승우 작가는 소설 속에서 '걷기는 현재를 밀어내는 일'이라는 표현을 썼다. '걸을 때 현재는 나로부터 밀려난다(135쪽)‘라고 덧붙이며. 발이 땅에 닿아 땅을 밀며 앞으로 가는 행위가 걷기인데 내가 간 거리만큼 그 거리는 과거가 되고, 지금 이 순간은 나의 발에 의해 밀려나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나는 다시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으며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되는 행위를 이어간다. 따라서 걷지 않는 자는 현재를 밀어내지 않는 자이고, 그렇기에 그곳에 머물러 안주하는 자이다. '안주한다는 것은 도망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그 이유에 대한 각성이 없다는 것이다.' 걷지 않는 자는 끔찍한 덩어리 퇴적물, 죽은 과거에 다름없는 말이다.    

 

그렇기에 한중수는 과거를 잊고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걷고자 했을 것이다. 그는 머릿속 사이렌을 멈추기 위해 걸어야 했고,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걸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폭력적인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했던 자신의 죄책감이라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사실이 자신의 머릿속 사이렌을 울려 스스로를 고통받게 했기에 끊임없이 앞으로 걸어가야 했다.           



낯선 곳에 숨다 그리고 낯선 곳을 여행하다     


낯선 곳인 캉탕으로 가서 체류하게 된 또 다른 인물, 한중수. 대서양 항구도시 캉탕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가 존재하는 낯선 곳으로 그려진다. 낯선 곳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곳이자 숨고자 한 의도 없이도 자연스레 숨는 행위가 가능해지는 곳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기도, 자신의 지난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일도 가능하다. 또한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움과 벗어남의 해방감을 느끼며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낯선 언어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의 현재가 뚜렷하게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이승우 작가는 이 낯선 곳에 대한 생각을 여행과 결부시켜 전개한다.      

"여행자의 자유로움과 여유는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보장된 귀환에서 비롯된다. 그렇지 않을 때 낯선 세계는 동경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다. (21쪽)“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고 때로는 쉼을 안겨준다. 일상을 떠난다는 사실에 한껏 해방감을 느끼고, 시간에 쫓기지 않고 순간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한 여유로움을 느낀다. 여행자가 여행지에서 자유롭고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돌아올 수 있는 귀환 장소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말한다.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일상이 있기에 떠난 그곳의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돌아올 곳, 돌아올 일상이 없다면 떠난 그곳은 두려움으로 점철된 곳이자 또다시 떠다녀야 함을 인식하는 일이기도. 떠남의 영역은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잠시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행하고 돌아온 날 내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이불 냄새를 맡으며 편안히 깊은 잠을 잤던 순간이 떠오른다. 여느 호텔 방 침구보다 편안히 내 몸에 꼭 맞는 그것들이 있기에 나는 쉬이 떠날 수 있었던 것. 낯선 곳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돌아올 내 자리가 있어야 한다. 떠남은 돌아옴을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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