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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Feb 01. 2024

그리움의 정원에서 거닐다

<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내게 네 죽음은 젖을 떼는 과정이다."

<그리움의 정원에서> 28쪽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고 그의 책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은 신비롭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지막 페이지가 오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책 속에 쏘옥 빠져 읽지만 휘리릭 이내 읽어버리지 않길 기도한다. 그의 소설 ‘가벼운 마음'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갖고 있다'라는 첫 문장의 강렬함이 여전히 남아있는 걸 보면. 가볍게 보이는 '가벼운 마음'을 읽고 나서 한동안 내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마지막 페이지가 오지 않길 기도하며 읽었는데, 그만큼 책 속에 빠져 지냈는데 뭐 하나 남길 수 없었다 (사실 읽고 뭔가를 남기려는 내 관성적인 이성을 크리스티앙 보뱅의 소설이 잠재웠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책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은 틀림없이 독자들이 손으로 만져가며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하는 글이라 생각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책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나에게는 없으니.


그의 소설이 그러했다면 에세이는 어떨지, 여전히 나의 언어가 부족함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그의 에세이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그의 책은 신비롭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길 저항하는 나를 발견하고, 내가 저항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가 품은 문장들 때문이다. 그가 품어낸 문장들을 나도 품고 싶었다. 오랫동안 거둬들여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에세이스트이자 시인이라더니, 문득문득 뱉어내는 문장들이 내 시선을 끌어 잡아 자신들에게 박제시킨다. '내게 네 죽음은 젖을 떼는 과정이다'라고 하더니, '너를 보고 있어도 여전히 네가 그리웠다'라고 하고, ‘네 무덤에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너를 본다' 라니...



한 여자의 삶과 죽음 모두를 사랑한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자전적 에세이다.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 여자를 그리워한다.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의 삶과 죽음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지슬렌.'

보뱅이 사랑한 그녀. 두 번의 결혼, 세 아이의 엄마.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여성. 사실 이런 것들은 그녀를 설명하는데 올바른 언어가 아니다. 보뱅이 그녀를 사랑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녀의 삶과 죽음 모든 순간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사랑 앞에 이유는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불필요하지만, 나는 무용한 추측을 해본다. '웃음' 그녀의 해맑고 천진난만한 웃음 때문이 아닐까 하고.


"너에겐 재산이 거의 없었다. 네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눈물과 웃음일 것이다. 눈물에 대해선 말하지 말자. 대신 웃음을 생각한다 (47쪽)."

"독선적인 아이의 마음에 네 웃음의 정수가 쏜살같이 날아와 박혔고, 너의 순수한 자유가 불현듯 내게 모든 길을 열어주었다 (42쪽)."

"너는 마지막 순간이 임박할 때까지도 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하는 세 아이와 함께 웃을 것이다 (68쪽)."


또 하나 보뱅이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자유로운 영혼.' 그녀는 사랑 속에서도 자유를 갈구하고, 자유 안에서 사랑을 찾는 사랑을 머금은 자유로운 새 한 마리. 자유와 사랑이 공존하길 바랐던 여성. 사랑이 지나쳐 변질되면 사랑은 속박과 부자유와 동일한 얼굴이 된다. 어느 굴레에도 갇혀있지 않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둘의 공존을 원했던 지슬렌. 널 사랑하지만 난 자유롭고 싶어. 자유 안에서 사랑하기를 원해. 사랑 안에서 자유롭기를 원해.


'너는 내게 속한 적이 결코 없었다. 너는 단 한 번도 누구의 소유인 적이 없었다. 너는 네가 만난 사람들을 온전히 사랑했다. 그리고 이 사랑 안에서 빛나는 자유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69쪽).'

보뱅은 그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자신에게 속한 적 없는 여자, 자신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속한 적 없는 여자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사랑했던 여자. 그녀의 사랑이 인류애는 아닐 텐데... 한 남자를 이토록 끌어안을 수 있었던 그녀가 무척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1995년 44세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지슬렌, 그리고 2022년 71세 나이로 별세한 보뱅. 이 책이 출간된 것은 그녀가 죽고 다음 해인 1996년. 보뱅이 그리움의 정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리움의 정원에서 정처 없이 거닐다, 상실감이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꿔 그를 따라다녔을지도 모른다. 슬픔과 허무와 고통과 공허가 뒤엉켜 그의 삶을 죽음과 동일하게 만들면서. 흐르는 시간의 힘은 그를 일으키기에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거슬러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그에게 유일한 방법은 아마 그녀를 종이 위에 그리는 일이 아니었을까.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잊지 않고 기리는 것이 아닐까. 먼저 떠난 이에게 그동안 하지 못한 말들을 내 손으로 하나하나 되새김질해 종이 위에 펼쳐놓는 것. 그것이 지슬렌에 대한 보뱅의 추모의 방식이자, 보뱅 자신을 위한 치유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내게 네 죽음은 젖을 떼는 과정이다’라고 했듯이…



'네 무덤에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비로소 너를 본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따라다닌 마음은 누군가를 줄곧 응시한 한 사람의 마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은 마음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마음을 따라다녔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했고 그리워하고 그리워했던 그 마음에 다가가려 했다. 서로 맺는 관계에 무관하게 사랑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으니까. 친구가 연인이 되고 연인이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과정 안에 무수한 사랑이 존재한다. 그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다를 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서로의 마음을 내어주고 마음 안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게 사랑이니까. 얼마큼 내어주고 존재하게 했는가에 따라 깊이는 다를지언정,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동일하다. 사랑은 그런 거니까.


책 속 문장에서 그를 발견한다. '응시는 뒤로 물러남을 전제로 한다 (113쪽).' 나는 늘 삶 속에 있다. 나는 늘 물러서 있다. 나는 늘 길을 응시한다. 나는 그곳에서 너와 가장 닮은 것을 본다 (115쪽).' 그는 늘 응시하는 사람이었다. 응시가 물러남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그는 삶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물러서서 나를 응시한다. 그러다 너를 응시하게 되고, 상실감을 응시하다 길 위에서 너의 존재를 응시한다. 길 위에서 너를 만난다.

'불타오르고 춤추고 노래하고 희망하고 놀라고 기뻐하는 것, 너와 가장 흡사한 그것. 그러나 그건 네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너이기도 하다 (115쪽, 인용한 문장에 이어진문장). 다행히 길 위에서 만난 너와 가장 닮은 것은 춤추고 노래하고 희망하고 놀라고 기뻐하는 것들이지만, 그것이 너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너는 아니라는 말. 보뱅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묻어나 있다. 그것들이 너와 닮았지만, 닮았다고 믿어보지만 닮은 것일 뿐 너의 실체는 아니라는 말.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지슬렌, 이제는 안다. 이제야 네 뜻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없는 삶을 여전히 축복하고, 계속해서 사랑할 것이다. 나는 점점 더 깊이 이 삶을 사랑한다 (118쪽).' 그리움의 정원에서 거닐던 한 남자가 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을 사랑의 감정으로 변모시켜 결국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슬픔을 머금은 아름다운 보석 같은 이야기. 그는 지슬렌의 무덤을 배회하고 배회하다 그 무덤에서 등을 돌려 그녀가 있었던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돼서야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보뱅의 책은 신비롭다.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읽힌다. 상실감은 삶의 희망으로 나아간다. 아프지만 아프기만 하지 않고, 기쁘지만 기쁘기만 하지 않는 게 삶이니 그는 글을 쓰며 삶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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