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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Feb 08. 2024

‘다시 없을 지금, 여기 다시 없을 내가 있다’

<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다시 없을 지금, 여기 다시 없을 내가 있다 “

<모든 요일의 여행> 125쪽



낯선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이 되고 싶었다. 나를 아는 사람도 내가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 떨어져 낯선 문화를 만나고 싶었다. 지루한 익숙함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낯섬과의 조우. 나태해져 있는 내 감각 세포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낯선 땅, 낯선 공기, 낯선 음식, 낯선 인간을 만나는 것은 익숙함에서 해방되는 길이고 나태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시간을 거슬러 가기도 시간을 앞질러 가기도 하며 낯섦을 찾아 떠나는 것. 내가 여행을 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요일의 여행>의 저자 김민철은 책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나의 파리와 너의 파리는 좀처럼 만나 지지 않는다(프롤로그).'

여행을 하는 이유도,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도,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그 무엇도 개인의 생김새만큼이나 다르다. 파리를 가는 이유도, 파리를 사랑하는 이유도, 파리에서 얻고자 하는 그 무엇도 개인의 취향만큼이나 다르다. 나의 파리와 너의 파리는 절대 같을 수 없다. 나의 여행과 너의 여행이 절대 같을 수 없듯이.

약 열흘간 런던과 파리로 훌쩍 떠난 친구의 부재에 함께이고 싶었다. 12년 전 나의 런던을, 나의 파리를 소환하면서 너의 런던과 너의 파리를 응시하고 싶었다. 10년 후 다시 만나기로 한 파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나의 일상을 책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단지 내 일상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친구, 그 친구의 파리를 함께 느끼고 싶은 것일 뿐. 마음만은 함께이고 싶었다. 낯섦과 만나고 있을 친구를 생각하며 함께 거닐고 싶은 마음. 그래서 나는 책장 속 어느 틈에서 오랫동안 나를 응시하고 있었을 책 하나를 꺼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고"

여행을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다. 휴식을 위해, 배움을 위해, 추억을 위해 등등의 이유로 여행을 한다. 전제는 동일하다. 일상을 벗어나는 것. 그 일상이 어떤 것이든 내가 자리한 곳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역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여행의 전제이자 이유가 된다. 그 전제와 이유가 여행의 즐거움을 위한 충분조건이 될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난다는 말은 일상을 떠난다는 말이고, 일상을 떠난다는 말에 목적지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나 여행 가'라는 누군가의 말에 목적지가 궁금하지 않았던 것은 그 말이 떠남을 의미한다는 것, 자유와 해방을 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김민철 작가는 여행의 정의 하나를 알려준다. '여기에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이라는 사실을. 그럴듯한 여행의 정의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지금 여기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여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지금 여기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당위성과 나아가 지금 여기에 행복한 사람은 누구나 현재 여기서 여행 중인 여행자라는 것. 과거 어디론가 여행을 하며 그때 거기서 행복했던 나를 떠올려본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았던 나를 떠올려 본다. 다시 '여기에서 행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하는 나를 떠올려 본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사람은 이미 여행 중일 지도 모른다. 매일이 여행처럼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사람은 떠날 필요도 떠나고 싶은 욕구도 없을지도 모르고. 일상이 여행이고, 여행과 같은 일상이기에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니 과연 있기나 할까.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는 책에서 이런 말은 한다.

'무엇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고 자기가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노는 그 순간이 어린이의 현재를 빛나게 한다.'

아이가 노는 순간을 보면 오늘만 있는 사람처럼 논다. 영하의 추위에도 놀이터에서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잡기 놀이를 하다 외투를 벤치에 내팽개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콧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물결무늬를 찍어내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기 바이러스는 그런 아이들을 보고 놀라 얼씬도 하지 못한다. 일상이 놀이고 놀이가 일상이 되는 어린아이들이 진정 일상의 여행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가 더 늦게 귀가하는지 저녁해와 내기하는 아이들, 진정 일상이 행복한 여행자.

'파리 전체가 영원한 유혹'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여행을 한 작가의 여행 경험담이 책 곳곳에 담겨있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위스 등. 특히 프랑스에 대해서는 개인적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듯 보였다. 파리로 여행을 간 친구 덕분인지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파리를 가기로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속상함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 이야기들이 유독 눈에 많이 들어왔다. 파리를 꺼내면서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 소설에서는 사물에 대한 열망에 인생이 저당 잡힌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데, '파리 전체가 영원한 유혹'처럼 그 두 사람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곳이 바로 파리. 삶을 사랑하기보다 사물들을 사랑하게 되는 곳이 파리. 작가는 파리에서만은 <사물들>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는 듯했다고. 그만큼 그곳은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들이 즐비하다는 이야기겠지. 수 세기 전 건물들이 여전히 보존되어 있고, 그 공간들은 살아 숨 쉬는 역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공간에 자리하는 사람들만 세월에 따라 달라질 뿐, 공간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걸어 다녀야만 하는 골목 곳곳에 카페와 레스토랑, 상점들이 올망졸망 모여있다. 테라스 테이블에서 에스프레소와 드래프트 맥주를 마시며 세느강의 반짝이는 윤슬을 응시한다. 옆 테이블들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로맨틱한 발음들이 귀를 민감하게 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수다쟁이라고 하더니, 만나서 앉기만 하면 세상만사 이야기를 하는 듯. 식사 속도는 그래서 느릴 수밖에 없고. 그들의 문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특히나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는 걸 즐겨하는 듯 보였다. 남프랑스 님므, 루마랭, 유제스와 같은 시골 마을을 즐겨 다녔다고 한다. 파리와는 다른 남프랑스의 고즈넉한 풍경이 있을 것 같다.

작가는 또 아일랜드로 맥주 기행, 프랑스 부르고뉴로 와인 여행, 남프랑스로는 카뮈 기행을 떠났다고 한다. 아일랜드 기네스 흑맥주도 마셔보고 싶고, 부르고뉴 산지 와인을 코가 비뚤어지게 마셔보고 싶고, 남프랑스로 카뮈를 만나러 가고도 싶다. 시간은 없고 돈은 부족하고 할 일은 많고. 아니 다시! 시간이야 만들면 되고 돈은 갈 만큼 적당히 모아 보기로 하고 할 일이야 대충 눈 감으면 되지. 아이들처럼 일상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없으니, 즐거운 여행을 위해 일상을 쥐어짜보기로.

"What's your favorite?"

마법 같은 문장 하나를 작가는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여행 좀 해 본 여행 선배가 초보 여행가에게 전해주는 조언 같은. 그것은 다름 아닌 '너의 최애가 뭐야?'라는 마법의 한 문장(다음에 여행을 하면 나도 써먹을 요량). 대학 시절 캐나다에서 잠깐 지냈을 때도 현지인들이 자주 내게 하던 문장도 이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콘텐츠에도 상관없이 불쑥 들어오던 문장, "소피아 그래서 너의 최애는 뭐야?" 그곳 사람들은 참 질문을 좋아하는다는 생각도 덧붙여했던 것 같다. wh-question을 무진장 나에게 퍼부었으니.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가라고 생각하며 식은땀이 범벅된 대답을 하기 바빴었다.

작가는 여행 중 자주 현지인들에게 이 문장을 썼다고 소회를 전한다. 낯선 곳 낯선 식당 낯선 메뉴 앞에서 서빙 웨이터나 옆에 앉은 현지인에게 이 문장 하나를 말하는 순간, 모두가 진심이 되었다고. 자신의 최애를 알려주고 싶어서, 자신의 최애를 추천해 주고 싶어서, 나의 최애가 너의 최애가 되길 바라며. 질문의 힘은 강하다. 질문을 받는 순간 대답하고 싶은, 답을 주고 싶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 혹은 이타심이 낯선 곳 낯선 메뉴 앞에서 당황해하는 여행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 '이곳은 이게 괜찮아. 난 이것만 먹으러 여기 온다니까. 너희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혹시 생선 못 먹는 건 아니지?' 등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마법 같은 질문, 'what's your favorite?'

모르면 물어야 한다. 알더라도 모르는 척 물어야 한다. 낯선 곳에 불시착한 이방인은 자꾸 물어야 한다. 무지가 용인되는 곳도 낯선 곳이고, 무지가 배움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는 것도 이방인의 특권이니. 다음에 낯선 곳에 도착하면 꼭 이 질문으로 여행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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