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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Feb 15. 2024

강물처럼, ‘참 나‘를 찾아서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낼 것이다.’

<싯다르타>



'참 나'를 찾아가는 길, 몸으로 각성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으며 잡힐 듯 말 듯 누군가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싯다르타와 비슷한 인물을 과거에 만나 본 적 있는 듯, 책을 읽는 내내 그를 잡으려 애썼다. 싯다르타와 같이 '참 나'를 찾으려 부단히 애썼던 또 한 명의 인물. 그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또 다른 주인공 ‘싱클레어.'

소설 <데미안>을 시작으로 헤르만 헤세의 두 번째 작품, <싯다르타>를 읽게 되었다. 당시 <데미안>을 읽으면서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데미안을 만나 다시 태어나게 된 싱클레어에게 공감을 넘어서 동일시했던 경험이 있다. 소설 속 한 구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민음사 소설 <데미안> 발췌)'에서처럼 나는 알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가 되고 싶었다. 여전히 알 속에 머물러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알껍질에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 균열은 내가 나로서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한 그 시작이었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각성, 그 안에 위치한 나란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는 과정이 '참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참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다시 만난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 <싯다르타>는 <데미안>보다 훨씬 더 실질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알을 깰 것인가에 대한 답을 싯다르타의 고행으로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싯다르타는 적극적으로 알을 깨고 '참 나'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고행의 길에 나선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나 숲 속으로 들어가 3년 동안 몰입 수행(사마나가 되는 법)을 한다. 단식하는 법, 기다리는 법, 사고하는 법을 익히면서. 친구 고빈다와 함께 몰입 수행을 이어가다 붓다를 알게 되고, 붓다의 가르침(말)으로는 해탈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고빈다를 두고 혼자서 속세로 들어간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낼 것이다 (<싯다르타> 중)'라는 생각으로 떠난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누구의 가르침이 아닌 스스로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것. 내가 누군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이며 어떤 존재 가치가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는 결국 내 몸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다.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깨져야 한다. 직접 몸으로 각성해야 한다.

싯다르타는 속세에서 쾌락의 극한을 맛보며 타락한다. 타락의 끝은 절망과 공허와 황폐함 그리고 죽음. 죽음은 또 다른 탄생의 조건이 되고, 싯다르타는 죽음 직전 강물 곁에서 하나의 진리를 터득한다.

강물의 본질, 그 자리 끊임없는 생성


이 소설에서 '강물'은 함축적인 의미를 가진다. 싯다르타가 온갖 세속적인 타락 후 비참함에 고통을 받을 때 흐르는 강물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는 새롭게 태어난다. '강물은 흐르고 흘렀고, 끊임없이 흘러갔지만 언제나 거기 있고, 항상 똑같았지만 매 순간 새로웠다! (<싯다르타> 중)'라고 느끼며. 강물이야말로 자신에게 그 존재 자체로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느낀다. 강물은 언제나 동일한 존재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변화와 생성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존재였다.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살고 있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생성하고 있는 존재.

모든 살아있는 것의 본질을 강물에서 봤을 것이다. 자신이 찾고자 했던 생의 본질이라는 것도. 영원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우리도 순리대로 살아야 함을 깨닫지 않았을까. 강물이 흐르듯 우리는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며, 강물이 항상 그 자리 그대로 존재하듯 우리의 본질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참 나'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섰고, 숲 속에서 고행하며 고립된 삶을 살았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 쾌락을 경험했다. 죽음 직전 강물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본질을 마주했고, 그곳에 오기까지 그가 몸으로 느낀 모든 경험들이 이것을 느끼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품이 그를 각성하게 했을까, 숲 속에서의 고행이 그를 깨닫게 했을까, 아니면 붓다의 가르침이 그를 해탈에 이를 수 있게 했을까. 인간은 결국 자신의 몸으로 알을 깨야 한다. 누군가의 존재로 혹은 어떤 가르침으로 나의 알껍질에 균열을 낼 수 없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는 '부성애'에 대한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참 나'를 찾기 위해 아버지 품을 벗어나, 향후 속세에서 사랑을 나눈 여성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된다. 아버지와 싯다르타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부성애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을 보여주는 듯,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공감을 자아낸다. 아들을 곁에 두고자 하는 아버지에게 침묵과 부동의 자세로 저항하는 싯다르타의 모습과 싯다르타의 아들이 싯다르타의 사랑과 보살핌에도 결국 말없이 떠나 사라지는 장면은 자식을 둔 부모라면 상념에 잠기게 할 것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야만 하는 내 자식의 운명이랄까. 자식이라면 부모의 세계를 떠나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일까. 부모는 결국 '참 나'를 찾아 떠나는 내 자식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알을 깨고 훨훨 날아가는 그들에게 숙명적인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내 품에 있을 때 후회 없는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하는 것일까. 누구 하나 이 운명을 모른 척한다면 혹은 운명을 거스른다면, 과연 어떤 삶이 기다릴까.

싯다르타를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읽혔다. 아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려 절망한 싯다르타의 마음이 읽혔다. 싯다르타는 떠난 아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제야 아버지의 마음이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된 자식이 아버지가 되었기에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다. 싯다르타의 아들도 아버지가 되어야 비로소 아버지인 싯다르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은 떠나야 하고, 부모는 떠나는 자식을 바라보아야 한다. 자식은 부모를 떠나 부모가 되고, 부모가 된 자식은 비로소 부모를 사랑하게 된다. 강물은 그 자리 그대로 존재하지만, 매 순간 끊임없이 흐르고 있듯, 우리도 그 자리 그대로 존재하지만, 매 순간 변화하고 생성하고 있다. 강물처럼 사는 것, 그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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