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한 번 빠져봐야 탁구 선수지
"선수들도 물리치료받으면서 운동하거든, 자주 와서 치료받아라"
때는 2학년 겨울 방학. 아이는 탁구를 시작했다. 실내운동이라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긴긴 겨울방학을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 아이에게 제격이었다. 주 2회 탁구 레슨을 시작했으니, 지금까지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아이는 탁구로 성장하고 탁구로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탁구는 아이의 정체성 중에 하나가 되었다.
탁구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스매싱으로 탁구공을 여럿 깨트렸고, 그러다 3개월이 지나면서는 결국 정형외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진료 목적은 어깨 탈골. 어깨가 빠질 정도로 스매싱을 치고, 지치는 줄 모르고 탁구를 쳤으니. 탁구장에서 사는 다른 어른들과 힘겨루기를 하며. 탁구에 빠져들수록 어깨는 삐걱대고 있었으니.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탁구선수'라고 소개하는 아이를 보고 난감함을 넘어서 걱정이 앞섰다. '탁구를 시작하고 3개월 만에 어깨가 빠진 게 정상이냐, 이 녀석아'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겨우 참고 의사 선생님께 넌지시 물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기다리며. "선생님, 탁구 너무 많이 치면 안 되는 거죠? 그렇죠?" 하지만 이 두 남자가 작당모의를 한 건지, 의아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선수들도 물리치료받으면서 운동한다고. 자주 와서 치료받으라고... 오 마이 선생님! 이건 아니잖아요...
아이는 그 좋아하는 탁구를 2주간 쉬었다. 격일로 물리치료를 받으며. 선수의 생명은 몸 관리. 치료를 받으며 재기를 노려야 한다. 습관성 탈골이 되면 앞으로 선수 생활에 지장을 주니, 적당히 요령껏 쳐야 한다. 이것이 아이가 탁구를 시작하고 3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다.
운동 신경이 남다르다는 생각을 한 적 없이 아이를 키웠다. 늦게 기었고, 느지막이 걸었고 그리 부산스러운 아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운동 신경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키우긴 했다. 아빠는 태권도 4단 유단자에 어릴 때 워낙 뛰어다니며 공차기를 해서 얼굴 몸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고, 엄마인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학창 시절 달리기를 제외하고는 운동을 그리 못하지는 않았으니. (참고로 친정 부모님은 과거 테니스 아마추어 선수셨고, 현재는 골프도 수준급 실력으로 운동 없이 살 수 없는 분들이시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즈음해서 태권도, 수영 등 운동을 좋아했고, 운동 코치님들께 곧잘 한다는 말을 들었다. 뭐 남자애들 그 정도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그러려니 하고 지내다, 코로나가 잠잠해질 무렵 시작했던 탁구로 이렇게 아이가 성장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인 탁구, 장래희망으로 탁구선수라 말하고 다니기도 한다. 언제나 할 수 있는 실내 운동이라 좋았고, 상대와 공을 주고받는 운동이라 좋았다. 게다가 공으로 하는 운동은 구력이라는 게 쌓인다고 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 스스로 실력이 느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 반이 훌쩍 지난 지금, 아이에게 탁구가 없는 삶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다. 오후에 탁구를 하기 위해 등교 전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 할 일을 한다. 탁구 가는 날 하교하는 아이의 얼굴은 항상 빛이 난다.
지난해 올해 총 4번 탁구 시합에 출전했다. 구청장배 혹은 탁구협회장배 시합에 출전. 처음과 다르게 이제는 시합에 얼추 익숙해진 듯 보였다. 특히나 11월 25일에 있었던 탁구협회장배 시합에서는. 익숙한 공간, 익숙한 혹은 낯선 상대를 만나며 아이는 떨리지만 즐기는 듯 보였다. 아이도 아이지만, 사실 아이의 경기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훨씬 편해진 걸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 결승전 시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당황하는 아이의 기색, 흥분하는 아이의 모습 혹은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들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이의 도전이 나에게는 시련으로 다가오기도 했으니. 아이의 시행착오가 고스란히 내 세포에 감각되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응전하며 그동안 좋은 성적을 냈다. 3학년 첫 경기, 3위. 4학년 전반기 두 번째 경기 우승, 4학년 후반기 팀전 2위, 4학년 후반기 이번 우승. 아이는 이번 우승으로 2연패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이번 기회로 나는 나의 성장을 느끼기도 했다. 아이가 한 뼘 자란 만큼 부모로서 자란 나의 성장도. 나는 아이의 경기를 직관할 수 있었다. 아이의 시행착오를 직시할 수 있었다. 오늘의 실패가 앞으로 더 자랄 수 있는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모든 순간이 배움이고 성장을 위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아이는 일주일 전부터 시합 당일까지 디데이 카운트를 세며 기대 듬뿍 긴장감을 내비쳤다. 2연패를 꼭 달성하고 싶다는 포부를 던지며. 매번 아이에게 우승을 내준 아이는 그날도 아이를 보자마자 "오늘 꼭 널 이길 거야!"라며 장난을 섞어 진심을 말했다. 11살 12살 정도의 아이들이 마치 서로의 칼을 겨누고 진검승부를 하는 투사들로 보였다. 기필코 이번엔 꼭 너를 넘어설 거야, 다시 겨뤄보자, 오래 기다렸다!
탁구채를 쥔 두 투사들이 드디어 테이블 앞에 마주하고 작디작은 가벼운 탁구공을 허공으로 던져 올린다. 웃음기 이내 사라지고 눈에서는 불꽃이 일렁인다. 우승을 차지하려, 우승을 고수하려. 서브 미스에 탄식하고, 2:2 세트 스코어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아이들은 이 운동으로 이 시합으로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 공 하나에 울고 공 하나에 웃는, 어처구니없는 서브 실수에 울고, 행운의 엣지에 마음을 쓸어내린다. 뜬 볼을 급하게 스매싱하려다 아웃이 되고,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려 스스로 역이용당하기도 한다. 10:10 듀스 상황 공 하나하나에 사활을 걸기도 한다. 아쉽게 진 패배자는 씁쓸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가까스로 이긴 승리자는 하늘을 향해 포효를 한다. 상대 선수의 기량을 전략 분석해서 다음을 기약하기도 하고, 상대 선수의 분석을 무용하게 만들려 또 다른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아이들은 탁구대 앞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더 이번 시합 아이의 경기를 두 눈 부릅뜨고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지더라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더라고, 2연패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더라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다.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의 약점을 채워가고 상대의 강점을 흡수하며 다음을 위해 심기일전하는 역사 속 전쟁터의 영웅들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듯, 포기만 하지 않으면 앞으로 노력하는 만큼 그만큼 더 진한 성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았으면 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다음이 있고, 이번이 있기에 다음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했다.
이번 시합, 아이는 자신의 목표대로 2연패를 달성했다. 우승 상장을 받았고, 상금으로 2만 원 문화 상품권을 받았다. 탁구로 상장이 늘어나고 있고, 상금이 쌓이고 있다. 상장이 늘어나는 만큼 아이의 자존감도 높아지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도 상기된 아이에게 물었다. "이번에 널 꺾으려 했던 형은 정말 마음이 안 좋겠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정말 속상할 것 같은데.." 아이는 말했다. "그렇긴 하겠다. 근데 지난번보다 그 형 실력이 더 늘긴 했더라고. 백 쪽이 약점이라 공략을 좀 하긴 했는데, 그래도 쉽지 않았어. 만족스러운 경기는 아니었어.."
아이는 자신의 목표였던 2연패를 달성했으나 자만하지 않았다. 본인도 앞으로 꾸준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말을 한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세 번 세네 시간씩 치고 있는 아이가 이렇게 말하니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아이는 탁구로 인생을 알아가고 있다. 초4, 탁구 인생 2년, 땀 흘린 만큼 즐긴 만큼 실력이 쌓이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가고 있다. 시합에 나가 도전하고 응전하며 최선을 다해 순간에 머물러보기도 하며 인생을 즐기는 아이. 운동시키기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