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으로 떠난 이유는 내가 학부시절 연구실에서 함께 인턴 했던 언니를 보기 위함이었다. 최근 결혼을 준비하며 언니가 생각이 났는데 그 언니는 내가 진로에 대해, 연애에 대해 고민을 할 때마다 나를 믿어주고 내가 울면 안아주며 따뜻한 말로 보듬어 주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향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연구실 교수님께서 "**남편은 결혼 참 잘했지"라고 하자 언니는 "저도 결혼 참 잘했어요"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나도 언니 남편을 잠깐 본 적이 있지만 잠깐 보거나 언니를 통해 듣기만 해도 따뜻한 두 사람이 서로를 지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석사를 하고 학자의 길을 그만두었지만 언니는 멋지게 박사를 끝마치고 지금 강릉 원주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었다. 작년까진 혼자 강릉에 지냈지만 현재는 미국에 있던 남편은 한국에 들어와 재택근무를 하게 되어 남편과 6살 아이와 3명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언니와 언니의 사랑, 언니의 가족에 대해 모두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을 앞두고 언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강릉으로 가게 되었다.
언니는 내가 강릉에 도착하는 시간에 강릉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11시쯤 만났는데 12시 반에 갑자기 학교에서 회의가 생겨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것을 너무 미안해했다. 나는 아쉽긴 했지만 그냥 언니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너무 반갑고 행복했다. 언니는 나의 학부생 시절 열정 가득하던 눈빛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언니가 요즘의 언니 가족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언니가 가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언니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언니가 어제도 회식을 하고 밤늦게 들어갔다고 한다. 짧은 점심을 하고 저녁때 언니가 내가 저녁 먹은 장소에서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는데 그때도 하루종일 육아를 하던 남편이 뻗어 언니와 아이 둘만 차를 타고 나왔었다. 언니는 모성애도 그렇게 크지 않고 남편이 그런 성향이 더 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나도 '내가 아기를 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나 스스로가 너무 중요해서 잘 모르겠다'라고 하자 언니가 보는 나도 그렇다며 내가 전업주부를 하면 힘들 거라고 말했다.
2015년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나서 한창 진로고민을 하고 언니는 아이를 낳기 전이었는데 2023년 우리가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신기했다. 언니는 갸녀리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언니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강하고 현명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교수라는 직업과 남자아이의 엄마라는 언니의 새로운 정체성이 언니를 조금은 변화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여전히 언니가 좋고, 내 곁에서 언니의 이야기를 해주고 나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그 따스함이 고맙다. 한 시간 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것으로 내가 소중한 휴가를 내고 강릉으로 올 이유가 충분했다.
썸머키친은 강릉에서 2달 파견생활을 했던 남자친구가 여러 번 이야기했던 프렌치식당이었다. 드디어 궁금해서 방문한 이곳은 음식, 인테리어, 테이블세팅, 모든 소품 하나하나가 참 좋았다. 예사롭지 않아 찾아보니 대표님이 호텔경영을 전공하고 호텔에서 오래 근무를 하셨고 미적 감각이 탁월하신 분이셨다. 남자친구에게도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자 정말 이곳은 오래오래 있어줘서 강릉에 올 때마다 들리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가게 안 식물들도 참 예뻤는데 이곳에서 나비수국에 이어 정말 마음에 드는 식물을 만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어니언수프는 미소가 절로 지어질 만큼 맛있고 달콤했다. 비프부르기뇽의 소스와 같이 곁들여진 야채도 맛있어서 소스를 남김없이 먹었다. 가장 맛있었던 건 샐러드였는데 따뜻한 샐러드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양상추를 휘리릭 따뜻하게 조리한 것은 처음이라 색다르고 맛있었다. 완두콩, 베이컨 등 식재료의 조합도 아주 훌륭했다.
모든 것이 좋았지만 이곳이 더 좋아진 이유는 계산을 하며 그릇에 그려져 있던 썸머키친의 로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로고의 정체가 여우인지 염소인지, 썸머키친의 썸머가 왜 썸머인지 여쭤봤다. 썸머키친은 본 건물에서 떨어져 정원에 위치한 주방이라는 뜻의 단어이고, 로고의 여우는 사장님 아들이 4살 때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하셨다. 이 아름다운 공간을 만든 사람의 따뜻한 가족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곳이 좋아졌고, 이 분들이 만들어 내어 주신 음식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며 남자친구가 2년 전에 이곳을 와보고 이야기를 해줘서 오게 되었는데 또 오고 싶다고 오래오래 있어달라고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감사하다며 열심히 하겠다고 인사를 해주셨다.
명주상회는 동네사랑방 같은 공간인데 내가 머무는 동안 옆테이블에 앉은 박사님과 인연이 되어 결론적으로 나는 강릉에서 선물 같은 하루를 더 보내게 된다. 옆테이블에 앉는 박사님과 명주상회 사장님께서 가시연습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인상 깊게 나누어서 나도 그 대화에 합류하게 됐다. 가시연은 수련과의 꽃인데 여름철 해가 있는 오전시간 때에만 볼 수 있는데 너무 신비롭게 생긴 식물이었다. 가시연습지에 내가 너무 가고 싶어 하자 오늘 저녁 선교장에서 야외음악회도 하고 여름에 강릉에 축제가 많다며 내가 저녁기차로 강릉을 떠나는 걸 함께 아쉬워하셨다. 하루 더 머물고 싶어도 숙소도, 일요일 기차도 없다며 아쉬워하는 나에게 명주상회 사장님은 잠깐 기다려보라며 근처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시는 지인분께 전화를 하셨다. 내가 인터넷으로 검색했을 때는 마땅한 방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곳에 마침 남는 방이 하나 있다고 하셨다. 이런 행운이! 이제 남은 과제는 기차표였는데 당연히 극성수기 일요일 오후-저녁은 모든 열차 매진이었는데 나는 십 분 정도 계속 새로고침을 해서 여덟 시 기차를 예매할 수 있었고 그날 기차표는 취소를 하게 되었다.
충동적으로 나는 강릉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되었다. 가시연습지를 소개해주신 박사님은 다음날 습지를 가면 해설을 들을 수 있는 해설사분도 소개해주셨는데 다음날 이분과 또 소중한 인연을 만들게 된다. 아무튼 나는 명주상회를 나서 강릉역에서 보관한 짐을 찾아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을 하고 선교장 음악회를 갈 계획을 세웠다. 나서려는 나에게 사장님은 잠깐 기다려보라며 카페영업을 마무리하고 나를 강릉역까지 차로 바래다주셨다.
강릉역에서 짐을 찾아 게스트하우스에 들렀다 선교장을 가서는 명주상회에서 만난 박사님을 또 만나기도 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일어선 나에게 박사님께서 다가와 인사를 해주셨고 허균허난설헌 산책길이 밤에 걷기 너무 예쁘다며 그곳으로 차로 데려다주시기도 했다. 명주상회를 통해 신기하고 소중한 인연이 줄줄이 연결되고 있었다.
다음날 기차를 타서 명주상회 사장님께 문자를 드렸더니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셨다. 명주상회 공간과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나는 선물같이 오래 기억할 것이고 조만간 또 방문하게 될 것 같다.